사회학적 통념에 따르면 정체성(또는 동일성)은 자기 자신이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의 집합이다. 이를 통해 그때 그때의 개별적인 행위는 하나의 일관된 전체로서 통일성을 갖게 되고, 행위하는 주체 역시 그러한 통일성을 통해 정의되는 자기동일성을 갖게 된다. 이런 점에서 정체성은 사회적 주체가 자신을 하나의 동일한 주체로 인지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정체성에 관한 논의들이 에고(ego)나 자아(self), 주체(subjectivity) 혹은 의식(consciousness) 혹은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에 관한 논의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이론적인 맥락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용어상의 혼란에 따른 이론적 혼란을 낳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정체성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고 정체성 논의는 왜 필요한가에 대한 설명이 요구된다.

정체성 구성의 논리
이를 논하기에 앞서 우리는 개인이 정체성이라는 자기동일성에 이르기 위해 거치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의 중심에는 구별과 차별화라는 두 가지 과정이 배치된다. 즉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은 먼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 혹은 집단과 구별짓는 과정을 포함한다. 또한 차별화를 통해 인위적인 차이를 두각시킴으로써 보다 능동적으로 특정한 귀속의식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정체성이 온전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기인식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자신이 인식하는 대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부르디외는 권위에 의해 옹호되는 orthodox와 구별되는 개념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특정한 사회적 범주를 doxa라고 불렀다. 이 사회적 범주는 나와는 상이한 배타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간주함으로써 타인 혹은 집단을 구별하고 차별화하는 방식을 통해 구성된다. 그러나 문제는 구별과 차별화, 또는 사회적 범주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어떤 확신이다. 다시 말해 모호함 속에서 타자(others)의 진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는 확신이 그것이다. 이는 수많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붙들고 해결하려 한 문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적대가 상호인정의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하나의 동일성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했다. 반면 맑스는 사회나 인간이라는 개념이 전제하는 보편적 본질의 동일성이란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광범위한 적대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계급의 의식에 내면화된 부르주아적 규범이기에 해체되어 마땅한 허상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헤겔의 주장처럼 주인과 노예가 상호인정의 변증법 또는 특정 조건이 어떤 개인을 자동적으로 대상이나 주체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를 노예로 인식하고자 하는 주체에 의해 추상화되고 존재의 전체성이 제거, 생략, 정리 됨으로써 강제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근대적 주체와의 문제
이러한 문제설정은 자기존재의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근대철학의 핵심쟁점이라고 할 수 있는 주체와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후기 근대의 대표적 학자로 불리는 푸코는 이를 비교적 간명하게 질문한다. “그러므로 말하여진 것 속에서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즉, 그의 관심은 관념으로써의 정체성이 아니라, 정체성이라는 진리가(眞理價)를 구성함으로써 그 안에서 권력을 획득하려는 담론적 실천이다.
정체성은 흔한 말로 몰래 숨어 있어 찾기만 하면 되는 것이거나, 어떤 개인이 자신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정의를 통해 확인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개인에게 주어진 위치를 고정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위치에 걸맞는 역할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것을 지시한다. 따라서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인식 공간에서는 춤-노동자, 여행-노동자는 생산-노동자를 전제할 때만 어느 정도 인정되는 수준으로 수용된다. 그리고 노동자는 이를 자기가치화함으로써 스스로의 욕망을 동일성의 형식, 즉 ‘일하는 노동자’ 내부에서만 제한적으로 배치한다.
인류는 정체성과 자기동일성의 참혹한 역사를 경험했다. 나치가 그러했고, 기독교-이슬람교, 남과 북, 한국(민족)과 일본(민족)이 그러하다. 그러나 다른 정체성을 가졌다고 간주되는 이들에 대한 태도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으로는 동일한 정체성 내에 있는 이들의 탈정체성을 막기 위한 강제를, 이론적으로는 변혁을 위한 집합적 행위와 정체성의 논의를 어떤 방식으로 가져가야 하는가에 대한 합의가 가능할 것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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