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재/조선대학교 신문방송학과교수

21C 문화의 흐름 : (2)디지털 시대의 글쓰기
"21세기 문화의 흐름" 두번째 기획에서는 '디지털 시대, 글쓰기의 미래'에 관해 디지털 사상가 플루서(V.Flusser)의 이론을 중심으로, 문화의 흐름이 어떻게 인간의 삶의 의미를 변화시키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최근 ‘인문학의 위기’를 이야기 하면서 글쓰기 방법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주체적이고, 비판적인 글쓰기 방식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 철학자이자 디지털 사상가인 플루서(V. Flusser)의 입장에서 보면 현재의 글쓰기가 위협받고 있는 것은 인문적, 비판적 사유의 빈곤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문자코드’에서 ‘디지털 코드’로의 변환이라는 더 근본적인 곳에서 글쓰기의 미래를 본다.
 
  플루서는 <문자(Die Schrift)>(1992)라는 저서에서 알파벳 문자가 디지털 코드에 의해 추방되는 현상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그는 역사시대가 시작될 때 알파벳(자모) 문자가 그림에 대항했던 것처럼 오늘날 디지털 코드는 알파벳 문자를 추월하기 위해 대항하고 있다고 본다. 역사시대의 알파벳 문자에 기초한 사고가 전역사시대의 그림에 기초한 마술적 사고에 도전했다면, 20세기 말 디지털 코드에 기초한 사고는 알파벳 코드의 구조적·체계분석적 사고방식을 대변하는 과정적·발전적 이데올로기에 대항하고 있다는 것이다. 플루서는 알파벳이 계몽의 코드로서 문자발명 이후 문자 텍스트를 통해 계몽에 성공하기까지 3천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지만, 21세기 새로운 계몽에 성공하는 데 몇 십 년이면 충분할 것처럼 보인다고 전망한다.

디지털 코드에 의한 문자텍스트의 추방
  선형코드인 텍스트가 진주 목걸이처럼 실과 바늘로 꿰어져 역사(이야기)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는 논리적 사고를 발전시켜왔다면, 디지털 코드는 컴퓨터 키보드 위의 손가락 끝으로 입자로 붕괴된 선형코드의 간격을 점들의 조합으로 메움으로써 우연과 가능성의 세계를 ‘모델’로 제시하는 황당무계한 사고를 요구하고 있다. 역사시대에 우리가 ‘쓰기’라고 부르는 ‘꿰기’에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했다. 느슨한 요소들, 실 그리고 바늘이 그것이다. 우리가 쓸 때 느슨한 요소들은 자모와 숫자이고, 실은 언어이며, 바늘은 펜이나 타자기였다. 문자 텍스트를 쓸 때, 곧 꿸 때 우리는 언어의 규칙인 논리를 따라야 했다. 그리고 이 논리적 사고는 이성에 의한 발전 이데올로기를 통해 일시적으로 지구를 지배했다. 그러나 오늘날 텍스트의 문자기호 간의 간격이 벌어짐으로써 텍스트의 줄은 다시 요소들로 붕괴되는 위기를 맞게 된다. 한 마디로 문자 텍스트 세대들이 세계를 과정들로 꿰는 데 사용했던 실마리는 사라지고, 그 세계는 먼지처럼 흩날리고 윙윙 난무하는 입자로 흩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실마리를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유산으로 상속받은 바늘과 실을 이용한 꿰기 방법은 불필요하게 되었다.

텍스트가 아닌 불개연성의 평면으로
  이제 우리는 실마리를 찾지 않고 붕괴된 세계의 먼지를 떠나 새로운 평면을 향해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설명이 아니라 센세이션을 찾으며, 진리를 발견하려고 하지 않고 우리 주위에 윙윙 난무하는 가능성들을 이용해 불개연성(정보)을 만들려고 한다. 우리는 이제 연구자가 아니고 발명자이며, 더 이상 과학자가 아니라 예술가가 된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그림(평면 코드)은 모델이다. 곧, 점-세계로부터의 설계이고, 그 의도는 그 세계를 상상이 가능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이 평면은 점-세계에 다시 길이와 폭을 부여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길이와 폭 뒤에 깊이와 움직임도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해야 한다. 또한 이 평면은 추상적인 점-세계 때문에 “존재해야 하는” 것처럼 구체적인 모델이다. 플루서에 의하면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는 추상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가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제 구체적인 것, 곧 실제가 더 이상 견지될 수 없는 점들의 세계가 탄생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는 점들의 조합이 얼마나 촘촘한지를 말해주는 해상도에 의해 결정되고, 이 실제를 체험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체험될 수 있는 것을 의도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이렇게 인공적으로 창조된 세계는 가능성들의 실현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우리는 가능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창조할 수 있다. 진리와 허위, 과학과 예술을 더 이상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디지털 세계에 “미쳐 있으며” 우리의 모든 체험은 공상과학이 될 것이다.
 
  이렇듯 디지털 시대의 도래로 인한, 과거의 선형적 인과관계로서의 사고파괴는 인류의 인문적 글쓰기의 종말로 보여 진다. 그러나 플루서는 문자적 글쓰기의 몰락을 절망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디지털 혁명으로 인한 사유 체제의 변화가 불가피하다면, 새로운 디지털 글쓰기의 패러다임 또한 준비해야한다고 말한다. 때문에 문자적 글쓰기에 익숙한 현대의 지식인들도 디지털의 기초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모델로서의 희망을 찾으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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