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신 / 사학과 박사과정

<일차원적 인간>은 실천적 지식인이었던 마르쿠제의 대표적인 저서인 동시에 1968년 혁명의 상징적인 작품이다. 물론 현실사회주의를 대표했던 소련이 붕괴하고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주도하며, 대량생산을 대신해서 정보와 바이오테크놀로지가 가장 각광받는 산업이 된 21세기에 1964년에 씌어진 <일차원적 인간>을 꺼내든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모든 ‘고전’들처럼 이 책은 21세기에 그리고 더 먼 미래에도 유효한 윤리적인 가치를 탐구하는 저서이며, 또 자본주의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제공하는 여전히 동시대적인 작품이다.
마르쿠제는 1950~60년대 선진산업사회의 인간이 현실의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할 줄 모르는 ‘일차원적 인간’이라고 단언한다. 흑인도 캐딜락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고, 사장과 노동자가 같은 휴양지에서 동일한 신문을 읽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기존 사회에 대한 불만보다는 순응주의와 성공에의 욕구만을 지니게 된다. 그들은 더 이상 노동해방의 구호를 외치지도 자본주의 철폐를 염원하지도 않는다. 단지 더 많은 물질적 풍요와 성적인 만족을 추구할 뿐이다. 그래서 현실을 파괴하고 극복하고자하는 2차원적인 사고는 억압되고, 현실의 질서를 긍정하는 1차원적인 사고가 선진산업사회의 인간을 특징짓게 된다. 그리고 물질적 풍요와 더불어 소련이라는 외부의 적에 대한 적대감도 일차원적 인간을 양산하는 주된 기반이다. 언제 공격해올지 모르는 소련은 미국인들을 ‘반공’이라는 기치 아래 결집하게 만들고 여타의 다른 가치들을 사장시켜 버린다. 이렇게 해서 전체주의 소련에 대응하는 미국 역시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라는 역설적인 정치문화를 생성한다. 또 무기 생산을 중심으로 산업을 재편하고 그것을 통해서 경제의 고도성장을 유지하는 ‘전쟁복지국갗는 공격과 폭력, 그리고 파괴에 대해 무감각한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더 이상 냉전 체제에서 살고 있지 않다. 그러나 누군가가 ‘악의 축’을 운운하면서 지속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21세기는 여전히 전쟁복지국가의 또 다른 판형이다. 또 이슬람과 소수민족에 대한 적대감이나 민족 간의 분쟁은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를 반복·강화한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쓰나미와 허리케인 카트리나 같은 자연의 복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과시적 소비에 목말라하는 우리는 끝없는 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의 최면에서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중심적인 분석 외에도 일차원적 인간을 생산해내는 기존 사회의 전략을 파헤치는 부분들은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 읽어도 놀라우리만큼 날카롭다. 깨끗한 작업장에서 잘 차려입은 직장 동료를 보면서 은근히 성욕을 만족시키는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헛된 만족감,  일상을 벗어난 공연장에서 연주되지 못하고 부엌의 배경음악으로 쓰이는 바흐의 작품이 지닌 현실을 긍정해버리는 성격, 그리고 내부가 훤히 보이는 통유리를 통해 자신의 섹시함을 과시하고 자동차의 브랜드로 자신을 표현하는 인간의 허위욕구에 대한 신랄한 고발은 인상적이다. 또 선/악과 진리에 대한 구분을 파기하는 ‘깨끗한 폭탄’, ‘호화롭고 평화로운 방공호’, ‘무해한 방사성 투기물’ 등과 같은 대립항을 통일시키는 언어 조합, 북대서양조약기구에 왜 터키와 그리스가 포함되었는가라는 의문을 사전 봉쇄하는 ‘NATO’와 같은 약어, 그리고 권위주의적인 심성을 은근히 주입하는 단정적인 명사의 보편화 등 왜곡된 언어는 사고과정을 단축시킴으로써 우리의 비판적인 정신을 마비시킨다는 마르쿠제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뿐만 아니라 기존 현실만을 가치 있는 연구 대상으로 다루는 경험주의적 연구와 언어분석철학의 논리실증주의가 변증법과 같은 2차원적인 비판적 사고를 억압한다는 통렬한 비판은 영미의 실용주의적 연구에만 관심을 가져온 한국 학계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무의식의 차원까지 지배당한 일차원적 인간들은 파멸적 자본주의에 대해 결국 무력하기만 한 것일까. 물론 스스로를 ‘대책 없는 낙천주의자’라고 말했던 마르쿠제는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말처럼 모든 발전은 그 안에 파괴의 씨앗을 담고 있기 때문에 대량생산으로 인한 풍요와 만족감도 어느 순간에는 스스로를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차원적 세계 안의 파괴세력은 누구이고, 또 저항의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그 해답을 찾아내는 것은 마르쿠제와 68세대의 실패를 경험했으며 여전히 억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의 몫이다. 그리고 마르쿠제의 말처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힘이고, 현실의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끝없는 동정과 연민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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