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완석/ 우석대 영화학과 교수

  21C 문화의 흐름 : (1) 21세기 영화의 화두 ‘인간 
 
21C 우리들은 벤야민이 말한 기술복제 시대를 실감하며 살고 있다. 이번 문화기획에서는 ‘영화의 화두’, ‘글쓰기의 변화’라는 두가지 테마를 통해 문화의 흐름이 인간의 삶의 의미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100여년의 짧은 역사를 갖고 있는 영화는 단순히 움직임을 재현하는 기술로부터 예술과 철학의 장으로 빠르게 발전하였다. 이는 기술과 마술, 상술과 예술의 복마전인 영화의 중심에 늘 ‘인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급예술과 대중예술 간의 경계가 느슨해진 최근에는 공상과학 영화와 같이 보다 대중적인 장르 영화들도 가볍고 쉬운 방식으로 인간의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인간 탐구에 있어서 이전 영화들이 관심을 갖는 부분은 정신, 종교, 죄의식, 욕망 등과 같은 추상적인 인간의 특성이었고 여기에는 인간 존재의 완결성, 유일성이 전제가 되어 있었다. 생명의 창조를 신의 영역에 대한 과학의 도전과 인간의 만용으로 그린 <프랑켄슈타인>에서 인간은 신에 의해서 창조된 완결된 유기적 조직체라는 생각이 전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영화의 경우 이러한 인간 존재의 완결성과 유일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두드러진다. 이는 인공지능, 유전공학, 장기이식과 같은 신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요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장기이식이 일상화 된 요즘 인간 존재의 유기적 완결성은 더 이상 인간 정체성의 조건이 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장기적출을 위해 복제인간을 생산한다는 설정의 <아일랜드>에서 보여주는 것 같은 유전자 복제 기술은 인간 존재의 유일성에도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결국 최근 영화에서 보여주는 인간 탐구의 관점은 기존의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기억, 인식과 같은 인식론적인 관점으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식론적 관점으로 바라본 인간


  인식론적 관점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과거에 대한 기억에 의해서 규정되며, 지금까지 이 기억은 고정불변의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토털 리콜>이나 <블레이드 러너>, <메트릭스>와 같은 영화들은 그러한 기억이 주입되거나 조작될 수도 있으며, 따라서 개인의 정체성 역시 조작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서 단기기억 상실증 환자를 주인공으로 한 <메멘토>는 기억이 주체에 의해서 능동적으로 조작되는 것임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물론 현실조차도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서 인지되는 것이 된다.
  신과 자연, 인간이 조화로운 공존을 영위했던 고대나 신을 중심으로 엄격한 위계질서를 유지했던 중세, 그리고 이성적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 되었던 근세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특정한 절대적 진리나 가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양차 대전을 비롯한 전쟁과 대량학살을 목도하면서 “신의 죽음”에 이어서 “인간 이성의 죽음”이 선언되었다. 이제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욕망과 무의식에 의해서 움직이는 존재로서 인식되었다. 동시에 급속도로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인류의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으며, 이에 대한 완벽한 통제는 불가능하다는 우려와 공포가 확산되었다. 특히 유전공학, 생명공학 등의 신기술의 발달과 지구촌 시대를 실현한 디지털 혁명은 기존의 인간과 세상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인간과 기계,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는 21세기에 영화는 이러한 새로운 인간과 세상의 모습을 시각화함으로써 이를 규명하려 한다.
  미래에 대한 묵시록적 비전을 보여준 <블레이드 러너>는 외모에서 뿐 아니라 행동이나 감정에 있어서도 인간과 쉽게 구분할 수 없는, 때로는 인간보다도 더 인간적인 인조인간을 통해서 인간이란, 인간다움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그리고 지젝이 ‘철학자들의 로샤 잉크반젼이라고 한 <메트릭스>는 종교, 철학, 윤리 등 다양한 문제들을 대중적인 방식으로 풀어내었다.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로서 영화가 계속해서 인간에 대한 탐구를 수행하는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인간복제라고 하는 예민한 문제를 액션활극 속에 희미하게 희석시켜버린 <아일랜드>의 경우처럼 스피드와 액션, 스타일과 멋의 과잉 속에서 정작 핵심이 되고 있는 주제를 놓치게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나아가서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영상들은 실제와 허구, 현실과 비현실 간의 경계 와해를 주제화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조장하는 측면도 갖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수용자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이다. 최첨단 기술이라는 엔진을 달고 달리는 인간 욕망의 초고속 열차에서 영화가 속도감을 즐기게 하거나 잊게 하는 것이 아니라 브레이크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은 결국 “마음속의 가시”를 지닌 관객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