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권위주의와 민주주의의 충돌

이 세상에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데 제대로 느끼지 못해, 이미 체화되어버린 ‘권위주의’에 대해 우리는 슬프다. 권위주의의 핵심은 ‘권위’이다.

국어사전을 들추면 권위란 어떤 분야에서 능히 남이 신뢰할만한 뛰어난 지식이나 실력이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권위주의는 권위에 대하여 맹목적으로 복종하거나 권위를 휘둘러 남을 억누르려고 하는 사고방식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권위’와 ‘권위주의’는 언어기호적 불일치를 표상하고 있다. 다시 말해 권위는 존경과 신뢰를 내포하는 것이고 권위주의는 공포와 불안을 표현하는 상징이 된다. 어의적으로 보자면 권위주의는 남들에게 신뢰를 받을만한 개인 혹은 단체의 특정한 노선 정도로 이야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권위없는’ 사람들에게서 무슨 권위주의가 세워지겠는가. 이제 진정한 권위주의가 세워져 우리의 슬픔이 없어져야 한다.

정치 문화에 영향받는 개인들

권위주의는 정치 문화를 배경으로 한다. 정치 문화는 한 사회 구성원이 공동으로 지니고 있는 정치에 대한 생각, 태도 및 가치관을 말한다. 고등학교 정치교과서에서는 권위주의를 만들어 내는 정치문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A나라 사람들은 권력을 소유한 사람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순응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정치 지도자가 내린 결정이 자신의 의사와 반하는 경우라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그 지시에 따른다. 또한 법 따로, 현실 따로 라고 생각하여 법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도 아는 사람을 이용하여 비공식적으로 해결한다”

그런데 권위주의와 달리 민주주의를 만들어내는 정치 문화에 대해서는 “B나라 사람들은 개개인의 의사를 매우 중시한다” 라고 시작한다. “가정에서는 부모들은 자녀들이 내린 결정에 대해 함부로 간섭하지 않는다. 사회에서도 다수의 의견에 반하는 소수 의견의 존재를 당연시하고 관용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분쟁이 생기면 공식적인 기구나 법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한다”

위에서 A나라는 대단히 권위주의적 정치 문화가 형성되어 있고 B나라는 민주주의적 정치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치문화는 넓게 국가는 물론 단체와 조직 좁게는 가정과 개인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이러한 권위주의는 현실 정치의 영역에서는 물론 남녀간의 관계에서도 권위주의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먼저 강간에 관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있다. 사건인즉 만취상태에서 성관계를 가진 한 여성이 형부를 준강간죄로 고소한 것에 대해서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한 일이 있었다. 판결문의 골자는 “피해여성이 술에 취해 ‘필름’이 끊겨 성관계를 했다 하더라도 적극 저항하지 않았다면 준강간이 아니다”라는 것이다.(2004년 3월 28일 서울고법 형사4부 엄상필 판사) 판결의 근거는 고소인이 술에 취해 이성적 판단이 흐려진 상태에서 형부의 성관계에 응했거나 적극 저항하지 않아서 피고인이 동의한 것으로 알고 성관계를 가진 것 같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판결의 사회·문화적 맥락은 남성 중심 권위주의에 기초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03년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남성 법조인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가 한국 남성법조인의 60%이상이 “여성의 야한 의상이 성범죄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94%이상의 법조인들이 “피해자가 가해자와 함께 여관에 들어간 경우 성폭력으로 인정받기 불리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런 남성 법조인들의 의식이 강간죄 판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뻔한 일이 아닌가.

유사학과 통폐합에서 드러나는 충돌

이런 뻔한 일, 권위주의 망령은 학교의 영역에서도 예외없이 드러난다. 중앙대에서는 유사 및 동일학과 구조조정이 한창이다. 스승이라는 이름으로 통폐합 해당학과 학생들에게 일언반구 의견을 듣지 않은 채 통폐합을 단행하려고 했었다. 이는 중앙대 대학본부가 그야말로 비민주적 행태 혹은 ‘아마추어적’ 행정 능력을 보인 것이다.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민주주의 정신이 넘치는 중앙대 교훈이 무색할 정도로 말이다.

당연히 교수의 권위는 있어야 하지만 교수의 권위주의는 청산되어야 할 때다. 교수는 지배자가 아니라 학생의 후원자이며 정신적 스승이다. 제자들에게 비민주적 모습을 보이는데 어떻게 미래 한국이 진정한 민주주의로 가는 것을 바란단 말인가.

얼마전 박범훈 총장은 중앙대신문에서 ‘구조개혁’이란 용어를 쓰고 있으며, 구조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에 맞서 ‘저항’할 것이라는 표현을 쓴다. 구조조정과 구조개혁. 전자는 위에서 아래로, 후자는 아래서 위로 마치 민주주의적 색채를 띤다. 구조개혁이란 용어의 선택은 권위주의를 감추고 있다. 다음에는 ‘저항’이란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저항은 강자에 대한 약자의 반응을 말한다. 그런데 누가 강자이며 누가 약자인지. ‘저항’이란 용어는 진정으로 통폐합 해당 학과 학생들의 선택해야 할 단어이다. 박총장이 선택한 용어는 엄청난 정치적 술수를 내포하고 있다. 아주 민주적인 것처럼 말이다.

통폐합 학과 학생들은 시대에 따른 학문적 패러다임 변화에 동의하며, 체계적이고 계획성 있는 통폐합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들이 분노한 이유는 바로 학교측의 일방적인 추진과 교수들의 권위주의라고 한다. 이번 중앙대 학과간 구조조정에서 드러난 학생들에 대한 교수들의 권위주의나 강간 사건 무죄 판결에서 나타난 여성에 대한 남성의 권위주위가 뭐가 다를까.

더욱 우리를 슬퍼하게 하는 것은 이러한 권위주의에 맞서 투쟁하지 않는, 권위주의를 스스로 사랑하고 있는 우리 지식인들의 마음가짐 아닐까.

이 글을 쓴 김영순 교수는 독어학과 84학번이며 현재 인하대 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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