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 문화예술경영학과 박사수료

본 지면은 교내·외 대학원생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소통의 장’을 열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됐다. 이번 호에서는 험난한 박사과정에서 큰 힘이 돼 준 선배에 대한 진솔한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자
신’만 챙기던 필자와 ‘타인’을 위하던 선배의 삶 사이에 놓인 좁힐 수 없는 거리,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새로운 감정과 배움의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려 한다. <편집자 주>


나의 선배에게

익명 / 문화예술경영학과 박사수료

  너를 처음 만났을 때는 석사 1차 때였다. 그때 박사과정이었던 너에 대한 첫 기억은 ‘이상한’ 선배였다. 그야말로 숨 쉴 틈 없이 과제와 일이 몰아치는 박사과정 때, 너는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후배들을 도와주곤 했다. 프로젝트 기간엔 쪽잠조차 맘 편히 자지 못하는 박사들의 생활, 상당히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삶이기에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너는 한국인 후배들뿐 아니라 중국인 후배들까지 끊임없이 챙기곤 했다. 과제나 논문 작성에 힘들어하는 후배들이 도움을 청할 때까지 기다려줬고, 도와달라는 말엔 늦은 밤까지 졸린 눈을 지새우며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가르쳐주곤 했다. 혹시라도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 싶어, 혹은 상대가 미안해할까 봐 도와달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던 너였다. 후배들을 도와주느라 네가 잠잘 시간은 4시간에서 3시간으로, 때론 2시간으로 줄어들었지만 너는 그 과정에서 후배들에게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나는 그런 네가 신기했다. 어떻게 이토록 다른 사람에게 다정할 수 있는 건지, 나이가 들수록, 그리고 스스로가 지치고 힘들수록 타인에 대한 배려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너의 그런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고, 또 그런 이유가 궁금해졌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후 학교에 오는 날마다 너를 찾았다. 너는 언제나 다정했고, 또 언제나 무심했다. 내가 수업이나 공부로 인해 도움이 필요할 때면 밤을 지새워 도와줬지만, 내가 건네는 선물에는 항상 무심한 반응이었다. 가끔은 나를 혼내기도 했다. 이런 돈 벌 시간도 아껴서 공부하라는 네 말에, 나는 갈수록 네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만큼 너를 더욱 알고 싶어졌다.
  그렇게 석사과정 2년 내내, 자연스레 옆에서 너를 지켜봤다. 어느새 우리는 학과에서 알 정도로 친한 선후배 사이가 돼 있었고, 여러 고민을 공유하는 사이가 됐다. 논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의 막막함, 대학원 생활에서의 고단함, 앞으로의 진로까지. 대학원 생활을 보낸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밤을 지새울 때 느껴지는 묘한 동질감과 동료애까지. 때로는 가족이나 친구, 연인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서로를 의지했다.
  그 시간 동안 내가 깨달았던 것은 이성 간의 사랑보다도, 동료애가 주는 끈끈함이 때때로 더욱 강하게 서로를 지탱해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대학원이라는 특수한 공간, 당시 파트타임으로 학업을 병행해야 했던 내 상황에서 너는 유일하게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었다. 처음 저널에 투고했을 때 너는 수없이 나와 함께 밤을 지새우며, 내 논문을 읽어줬고, 새벽에도 한글 파일이 메모로 가득할 정도로 피드백을 주곤 했다. 그런 너는 내게 있어, 같은 길을 가는 학문적 동지이자, 의지할 수 있는 선배였으며, 믿을 수 있는 친구였다.

 
 

너와 같이

  회사를 다니고, 대학원을 다닐수록 시간에 쫓기는 일이 많아졌다. 타인과 시간을 나눈다는 것은 시간을 ‘짜내는’ 일에 가까웠기에, 재미와 의미가 없는 대화가 아니라면 어느 순간부터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을 피하곤 했다. 재미는 대화에서 나왔고, 대화는 살아온 날들에 기반해 만들어지곤 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타인에 대한 배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의지. 젊은 날의 경험은 가치관을 만들고, 미래를 장담할 수 없음에도 하루를 버텨낸 이들의 눈물은 묘한 공감대를 형성하곤 했다. 다만, 슬픈 것은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갈수록 적어진다는 사실이었다.
  너와의 대화는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분명 하나부터 열까지 가치관이 달랐다. 살아온 날들이 너무나 달랐기에,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전까지 내 삶을 관통하는 단어는 ‘합리’와 ‘효율’이었다. 목표를 설정하고 이루기 위해 가장 합리적인 방법, 최선의 효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내가 선호했던 방식이었고,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기에 이타심에 기반을 둔 네 선택이 내게는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너는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너의 말에서 주어와 목적어는 항상 타인이었다.
  우리는 살아온 방식도 철저히 달랐다. 나는 무언가를 끝없이 욕망했고, 그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끼곤 했다. 그런 행위가 세상에서 스스로를 대상화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하루를 견딜 자신이 없어, 욕망으로 목표를 설정했고 스스로 몰아치는 방향을 택했다. 마치 경주마처럼, 옆을 보지 않은 채 오직 앞만 보고 달리는 행위는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세세한 감정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됐고, 귀찮고 번거로운 일에서 멀어지게 해 최선의 결과를 줬기 때문이다.
  반면 너는 사람을 욕망하곤 했다. 마음, 진심, 사랑. 일련의 감정들에 너는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이었다. 그것들이 아무것도 네게 보답해줄 수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네게 계속 말했고, 너는 내게 주는 사랑에 대해 역설했다. 우리는 서로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난 각각의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하나에서 만나 뒤섞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느새 문득, 너의 생각을 덧입힌 말을 하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었다. 오묘한 기분이었지만, 분명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너와 같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박사과정에 입학하게 된 것도 네 덕분이었다. 석사 이후, 박사의 길을 걷는 것이 맞을지 고민하던 내게, 너는 평소엔 볼 수 없는 단호한 목소리로 오라고 했다. “선생님,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박사를 따요. 공부는 때가 있고, 하고 싶을 때 해야 하는 거예요” 평소 더없이 순하고 세심한 성격의 너였지만 내가 어떤 결정을 고민할 때면 이토록 단호한 목소리를 내곤 했다. 너는 내게 2년 넘게 존댓말을 사용했지만, 오히려 나는 너를 통해서 반말 이상의 단호함이 존댓말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때로 ‘선배’라는 단어가 널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도 들 정도로. 우리는 두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그럴 때면 이상하게도 네가 어른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너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일렁였다.
  박사 입학 이후, 파트타임으로 타 대학 일을 병행하면서 어느새 네가 내게, 그리고 후배들에게 했던 행동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달았다. 선배로서의 책임감, 후배들을 보는 애틋함, 같은 길을 걸어가는 자의 안쓰러움. 그 여러 가지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엉켜있다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에게 배려를 한다는 것, 최선을 다하는 행위가 얼마나 많은 인내와 희생, 책임을 요하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네게 선배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는 사실이었다.
  석사과정 2년, 박사과정 2년. 벌써 4년을 대학원에서 보냈다. 그리고 대학원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왜 네가 먼저 떠오르는지 비로소 이 글을 쓰면서 이해했다. 대학원은 심오한 연구와 교수가 이뤄지는 곳이다. 삶에 있어, 진정한 심오의 연구는 ‘나’를 아는 것이었고, 공부는 스스로를 더 나은 방향으로 성장시키려는 목적을 지닌다. 너는 나를 더,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준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선택할 때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는 것, 상대가 상처받지 않도록 말에 붙여진 가시를 다듬는 것, 미래를 따뜻한 색으로 덧칠하는 것. 나는 그전까지 알지 못했던, 그리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던 일들에 대해 너는 말해주곤 했다. 그런 너를 보면서, 나는 너에게 자랑스러운 후배이자 친구가 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선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는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주던 존재였다.
  나는 아직도 내가, 너만큼 좋은 사람으로 누군가에게 남을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다. 다만, 여전히 이타적인 네가 내 선배라는 것이 기쁠 뿐이다. 그렇기에 최소한 너에게만큼은 괜찮은 사람으로 남으려고 노력해보려 한다. 네가 아니면 버틸 수 없었던 시간에서 언제나 나를 지탱해준 너에게 이 자리를 빌려 말하고 싶다. 진심으로 고마웠다고. 너는 내 대학원 생활에 있어, 최고의 선배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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