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걸 / 미술평론가

 

놀이하는 무당, 화해와 상생을 꿈꾸다

이재걸 / 미술평론가

 

호모 루덴스의 헤테로토피아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자신의 기념비적 저서 《호모 루덴스(Homo Ludens)》(1938)에서 호모 루덴스, 즉 ‘놀이하는 인간’의 문화사적 위상을 정립했다. 하위징아에게 ‘놀이’는 노동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으로서 비생산적·비생존적인 것에 몰두하는 행위이다. 얼핏 들으면 호모 루덴스는 혹독한 겨울을 준비하던 개미의 근면함을 조롱하며 여름 내내 노래만 부르던 베짱이의 나태함을 떠오르게 한다. 이는 마치 노동의 값짐도, 삶에 대한 겸손도 모른 채 오로지 쾌락과 망상에 사로잡힌 인간 유형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위징아는 문화란 호모 루덴스의 충동이 만든 산물이며, 놀이가 오히려 문화보다 상위 개념임을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놀이의 형태와 분위기는 문화의 태초 단계에 결정적 역할을 하기에 ‘놀이 정신’이 부재한다면, 문화는 존재할 수 없다. 미국의 신학자 하비 콕스(Harvey Cox) 또한 그의 저서 《바보들의 축제(The Feast of Fools)》(1969)에서 놀이는 비생산적 행위이지만, 자신의 존재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한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호모 루덴스야말로 문화의 진정한 주인공임을 재확인한다.
  호모 루덴스는 생존 활동에 쓰고 남은 정신의 잉여 에너지를 창의적으로 소비할 줄 아는 인간이다. 인류는 호모 루덴스의 놀이 정신을 통해 사회와 종교, 예술과 과학 등에 필요한 많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최근에 발표된 공현진의 논문에서도 ‘무속-예술-헤테로토피아’라는 큰 인식적 틀 안에서 ‘놀이 정신’의 참뜻을 폭넓게 환기하고 있다. 저자는 샤머니즘의 초월적 감각을 동시대의 문제에 투영하고, 이를 통해 호모 루덴스의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가 창출되는 과정을 기술한다.


샤머니즘과 휴머니즘 그리고 예술

 

  익히 알려진 대로, 유토피아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장소라면 헤테로토피아는 현실에 실재하게 된 유토피아이다. 미셸 푸코가 《말과 사물(Les Mots Et Les Choses)》(1966)에서 언급한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적 신화를 해체하는 ‘반(反) 공간(Contre-Espaces)’ 또는 이의제기의 공간이다. 공현진은 헤테로토피아의 위상학이 전복, 와해, 거부, 비판 등의 문학적 수사에 근거한 ‘장소-언어적’ 전략을 따른다는 사실에 주목해 무속의 초월적 추구가 현실에서 실현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더불어 여기에 풍부한 인용과 문헌 연구, 현장성 넘치는 사례 분석 등을 더함으로써 자신의 예술 담론을 수준 높은 예술학 논문으로 완성했다.
  미술가이면서 예술학 연구자이자 문화운동가이기도 한 공현진은 꽤 오랜 시간 동안 무속적 실천과 예술적 실천, 나아가 성(聖)과 속(俗)을 일치시키는 참여예술 프로젝트를 기획해 왔다. 무속의 정화의식과 현실 풍자를 결합해 삶의 비극을 웃음으로 승화하는 그의 예술은 언제나 상호 일체감과 해방감을 기원하는 민중의 통합적인 휴머니즘을 향해 있다. 그리고 그 특유의 휴머니즘은 수년에 걸친 지적 산고 끝에 『푸코의 헤테로토피아 개념을 통한 무속 이미지의 확장성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거듭났다. 이 흥미로운 논문은 특정한 이념적 구호나 전통에 대한 맹목적 예찬에 갇히지 않고, 분리와 불안, 위선과 불신의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한(恨)풀이와 현세구복(現世求福)을 위한 신명 나는 스펙터클을 제안한다. 상생과 연대를 위한 민중적 희망이 ‘거추장스럽고 가난한 낭만’ 정도로 치부되기도 하는 비정한 현실 속에서 참으로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아무쪼록, 화려한 오방색 무복(巫服)을 입은 한 예술가의 파격과 그 그로테스크한 놀이 정신에 담긴 세련되고 따뜻한 인간성이 박사학위 논문의 엄격한 구조를 뚫어내고 독자들에게 온전히 전달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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