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 동덕여대 독일어과 교수

 

우리가 꿈꾸는 사회의 예술, ‘사회주의적 고전주의’

 

송희영 / 동덕여대 독일어과 교수

 

  우리는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꿈꾼다. 눈물도 인정도 없는 자본주의의 무한 경쟁 앞에서 ‘다 같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갈망은 점점 더 강해진다. 이러한 바람을 문학에서 구현한 작가가 있다. 동독 출신 드라마 작가 페터 학스(Peter Hacks)의 문학 세계가 바로 그러하다. 흔히 동독의 3대 드라마 작가를 거론할 때, 학스, 하이너 뮐러(Heiner Müller), 그리고 하르트무트 랑에(Hartmut Lange)가 언급된다. 이 가운데 학스는 서독의 뮌헨에서 동독의 동베를린으로 이주한 작가라는 측면에서 흥미롭다. 그는 뮌헨 시절에서부터 드라마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현대 드라마의 대부라 할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극찬을 받은 작가이다. 그러나, 학스를 브레히트의 아류로 분류하는 것은 오산이다. 오히려 학스는 브레히트의 미학과는 완전히 다른 ‘사회주의적 고전주의 (Sozialistische Klassik)’ 예술 이론을 고안한 작가이다. 그는 브레히트의 계보를 잇지만, 브레히트의 전통을 넘어 브레히트 이후 동서독을 막론하고 독일어권 국가에서 가장 성공을 거둔 작가로 거듭난다.
  브레히트를 계승하면서 브레히트를 극복한 독일어권 최대의 드라마 작가라 해도 과언이 아닌 학스는 아쉽게도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학스와 관련된 학술 논문이 두 편 정도 발표됐지만, 하이너 뮐러, 폴커 브라운(V. Braun), 크리스타 볼프(Ch. Wolf) 등과 같은 동독 작가의 선행연구들과 비교해 볼 때, 학스에 대한 국내 학계의 연구는 거의 불모지라 할 수 있다. 그런 와중에 학스를 연구한 김학용의 논문은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브레히트 이후 최대의 드라마 작가라 해도 과언이 아닌 학스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내 학계뿐만 아니라, 국내 연극의 발전에도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 논문을 계기로 학스의 작품 번역과 또 다른 후속 연구가 나오길 바라며, 머지않은 시점에 그의 작품이 국내 무대에서 상연되기를 기대한다.
  그렇다면 서두에서 제기한 ‘다 함께 사는 사회에 대한 문학적 구현’을 김학용은 논문에서 어떻게 밝히고 있는가. 김학용은 학스가 동독의 현실 사회주의의 한계를 넘어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꿈꾼 작가로 평가하고 있다. 이는 학스가 동독의 현실 사회주의를 끊임없이 비판하면서 예술을 통해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논문은 학스가 이상적인 사회체제로서의 ‘사회주의’와 최고의 예술 형태로서 ‘고전주의’를 결합한 ‘사회주의적 고전주의’ 예술 이론을 도출해내고, 이를 바탕으로 문학 작품을 창작했다고 밝히고 있다.
  김학용은 학스의 ‘사회주의적 고전주의’는 동독 현실의 ‘혁명적 전통으로부터 고전주의 전통으로의 전환’을 일컬으며, 따라서 ‘사회주의적 고전주의’는 ‘혁명 이후의 사회’, 즉 ‘동독 현실의 계급투쟁’이 성공적으로 달성된 역사적 현실을 예술의 대상으로 삼은 미학적 구상이라고 강조한다. 말하자면, 학스의 ‘사회주의적 고전주의’는 동독의 현실 사회주의가 더 나은 사회로 진보하도록 구상한 것이자, 동독의 절망적 현실 앞에서 작가 학스가 취할 수밖에 없었던 예술적 행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학스의 ‘사회주의적 고전주의’는 현실 사회주의의 한계를 넘어서 ‘이상적 사회주의’를 지향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학스의 미적 경향에 내재된 이상주의로 인해 동시대 동독 작가들뿐만 아니라 비평가들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김학용은 학스야말로 보다 나은 사회주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동독의 사회주의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물론 혹자는 동독이 무너진 지 30년이 지난 지금 학스의 문제 제기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독이 무너졌다고 해서 수많은 사람이 꿈꾸는 ‘다 함께 행복하게 사는 사회’에 대한 소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자본에 의한 자본의 잠식 시대에 사는 21세기의 우리에게도 학스 수용의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김학용은 학스의 예술이야말로 동독 사회주의 사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자, 인류의 미래가 예술의 ‘아름다운 가상’이 되기를 희망하는 우리 모두의 바람이라고 밝히고 있다.
  ‘붕괴된 것은 체제이지 이데올로기는 아니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김학용의 논문은 오늘날 학스 연구가 왜 필요한지 밝히고 있다. 특히, 논문의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부분에서 학스의 이상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현실과 화해하는지 작품의 구체적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아담과 에바(Adam und Eva)》(1976)는 낙원이라는 공간에 오히려 낙원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유토피아의 부재를 역설적으로 강조하며, 이를 통해 동독의 현실 사회주의 사회가 더 나은 단계로 나가야 하는 과도기적 단계임을 밝히고 있다. 이 점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글을 쓰는 철학자 또는 철학하는 작가’로서 학스에게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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