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 독어독문학 박사

『페터 학스의 사회주의적 고전주의 이론과 창작 사례 연구』 김학용 著 (2022, 독어독문학과 독문학 전공 박사논문)
본 지면은 학위 논문을 통해 중앙대 대학원에서 어떤 연구 성과가 있는지 소개하고, 다양한 학과의 관점을 교류하고자 기획됐다. 이번 호에서는 독어독문학과 김학용의 박사 논문 『페터 학스의 사회주의적 고전주의 이론과 창작 사례연구』를 통해 페터 학스의 사회주의적 고전주의 이론의 개념과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연구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예술의 초월성과 현재성

 

김학용 / 독어독문학 박사

 

 
 

  페터 학스(Peter Hacks, 1928-2003)는 1955년에 뮌헨에서 동베를린으로 이주한 ‘동독 드라마 작가’이다. 동독으로의 이주 후, 그는 엄혹한 냉전의 분위기 속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자신의 위치에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학스는 1960년대 중반 무렵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회주의적 고전주의(Sozialistische Klassik)’ 예술 이론을 구상하고 발전시킨 작가이다. 그러나 학스의 예술 이론이 이상화된 역사 해석, 즉 가정된 역사를 근거로 한다는 점에서 동시대 작가들 이외에도 제도권 비평가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결국 그의 명성과 위상은 대략 1970년대 초반부터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작품 대부분은 동독이 아닌 서독 무대에서 상연되는 아이러니한 운명을 겪는다. 학스의 이러한 굴곡진 삶의 여정에도 그의 작품 공연과 상연 횟수를 살펴본다면, 동서독을 포함한 독일어권 국가에서 학스가 브레히트 이후에 가장 성공을 거둔 작가라는 사실은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론의 생성 배경

 

  학스의 창작 과정은 사회주의적 고전주의 이론의 생성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현실 사회주의를 ‘혁명 이후(postrevolutionär)’의 단계로 파악하는 학스의 역사 해석에 따른 것이다. 학스의 이러한 역사 인식은 뮌헨 시절에 쓰여진 작품과 동독에 정착하고 난 이후에 창작된 초기 작품, 즉 예술의 계몽주의적 경향과 단절하는 계기가 된다. 브레히트의 영향하에서 이 당시 그의 미적 경향은 지배 계급의 자의식과 사회적 관심이 전체 사회적 삶을 지배하는 전통적인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함축될 수 있다. 이는 역사극 시기에 해당한다. 또한 동독 사회주의 사회의 직접적인 현실 문제를 소재로 삼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는 시대극의 시기라 할 수 있다. 학스에 따르면 두 시기의 예술은 ‘혁멱 이전(Vorrevolutionär)’의 사회에 적합한 예술이다. 이와 달리 사회주의적 고전주의는 동독 사회주의 생산 방식의 승리와 함께 역사의 혁명적 과업이 이미 완성된 상태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예술의 새로운 발견과 위대한 미학적 문제의 재수용이 가능해졌다는 것이 학스의 기본 입장이다.
  이와 같이 혁명을 통해 이룩된 사회주의 사회가 학스 예술의 새로운 토대가 되고 있다. 무엇보다 학스는 이러한 사회에서 주체의 자아실현 가능성은 이미 ‘실현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로 인해, 혁명을 통한 사회의 역동적 변화를 테마로 하는 예술 대신 학스의 고전주의는 예술 외적 문제에 개입해야 하는 합목적성의 개념으로부터 탈피한 예술로 간주된다. 또한, 학스가 계몽주의 예술과 단절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체험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그의 좌절된 계몽주의적 시도가 그것이다. 학스가 초기 동독 사회주의 사회에서 현실 문제를 소재로 삼았던 두 작품 《근심과 권력(Die Sorgen und die Macht)》(1959), 《모리츠 타쏘(Moritz Tassow)》(1961)가 검열에 의해 동독 연극 무대에서 상연 금지된 것을 단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후 ‘삶에서 중요한 문제는 예술에서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인식하에 사회주의 사회의 ‘일상(Alltag)’의 모순과 갈등 대신 ‘신화(Mythos)’가 학스 예술의 주된 소재가 됐다. 이러한 일련의 경향으로 인해 학스의 고전주의 예술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대중의 현실 참여를 독려하는 ‘제도화된’ 동시대 예술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학스의 입장에서 궁극적으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구체적인 영향 의도를 갖는 계몽주의 예술의 역사적 종말이며, 동시에 현실과 거리를 두는 사회주의적 고전주의가 시대에 적합한 예술이라는 정당성이 부여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미적 의식의 역사와 한계

 

  학스는 자신의 세계관을 고전주의적 세계관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세계관에 따라 그는 작가와 관객이 기본적인 통찰과 판단에서 일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그는 사회주의적 고전주의의 위대성은 이상주의가 아닌 사실주의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학스가 자신의 주관적 세계관을 보편적 객관성으로 설명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예컨대, 학스는 과학적 사회주의 이후 현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적대적 모순이 사라졌고, ‘진정한 의미의 주체-객체-관계가 형성’된 것으로 주장한다. 이러한 사회 분석적 판단에 따라 그는 적대적 모순이 지양된 역사적 상태, 즉 총체성의 이상을 예술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동시에 그는 모순이 언제나 존재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모순은 미적 해결이 아닌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예술은 ‘상상된 정치적 실천’일 수 있다. 더욱이 그의 예술 이론 어디에서도 미적 현실이 곧 실재하는 현실이라는 주장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 가지 관점에 내재된 모순, 즉 미적으로 표현된 유토피아와 실재 역사의 두 가지 측면이 학스에 의해 함께 고려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예술의 기능은 예술 그 자체로부터 파생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학스의 예술은 주어진 사회적 현실을 초월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이 결코 평가절하되는 것은 아니다. 학스는 최근 예술의 대상으로서 유토피아와 현실의 관계로 이를 설명하고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유토피아로 발전해 나가는 현실 속에서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유토피아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유토피아가 현실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그것이 도달 불가능한 어떤 것이라는 인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때, 중요한 것은 유토피아가 역사 속에서 실현된 것은 아니지만, ‘지양’되는 과정으로 설명함으로써 두 관계의 기능적 상호작용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총체성의 이상으로서 유토피아와 현실의 동일성은 이미 실현된 것으로 간주되며, 이미 실현된 것에 실현될 수 없는 것이 전제되고 있다. 동시에 그렇게 실현될 수 없는 것은 이미 실현된 유토피아와 현실의 동일성의 원리로부터 파생된 카테고리여서 이전에 실현된 단계보다 더욱 진보한 또 다른 실현 가능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유토피아와 현실의 끊임없는 운동의 과정 속에서 학스에 의해 해방된 주체의 의미가 부여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의미 부여를 통해 현실 사회주의 사회가 더 나은 사회로 진보하는 불가피한 과도기적 사회 형태로 정당화되고 있다.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도달된 현실 사회주의 사회가 목적론적 역사관에 따른 운동의 과정 속에서 정당화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학스가 예술의 법칙과 실제 역사의 법칙을 더 이상 구분하지 않은 이상주의적 역사 해석의 결과에 따른 것이다. 원칙적 화해를 의미하는 총체성은 예술의 허구적 수사학이 자신의 고유한 역동성을 발전시킨 결과로써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에서 입증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학스가 현실 도피주의 작가로 비판받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학스의 이상주의가 비판받음으로써 그의 미적 의도는 이미 입증된 것으로 간주돼야 한다. 단적인 예로서, 관객의 현실 참여를 독려하는 예술의 영향 가능성은 학스의 미적 의도에서 완전히 배제돼 있다. 그 대신, 그의 작품 또는 미적 의도를 이해할 수 있는 ‘상상된 관객’이 전제되고 있다. 당연히 이러한 관객은 현재의 관객이든 미래의 관객이든 학스의 이상주의를 비판함으로써 이를 통해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를 구현할 수 있는 역사의 주체여야 한다. 그러나 유토피아의 허구성이 학스가 의도하는 관객에 의해 비판되지 않고, 이로 인해 현실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가 구현되지 않는다면, 자기희생적인 작가의 노력이 구체화 될 때까지 예술가 주체로서 학스는 현실 사회주의 사회에서 ‘미래 예술’의 창작자로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말하자면, 작가의 실천적 행동의 산물로서 예술 작품이 역사적 장소이면서, 동시에 학스의 미적 의도가 정확하게 반영된 객관적 자료인 셈이다. 따라서 학스의 예술과 제도권 예술의 차이는 단지 방법론에 있을 뿐 학스는 사회주의 사회 내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위한 작가로 평가돼야 한다. 이러한 경향이 목적론적 역사관의 범주 내에서 학스 자신에 의해 가정된 역사와 실제 역사 간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작가의 ‘의식적 행동’에 내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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