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우 / 충남대 스포츠과학과 조교수

 수백억에 달하는 연봉을 받는 선수가 경기장에서 뛰고 있다. 그리고 같은 공간에 종료휘슬이 울리면 다시 회사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선수도 함께한다. 상황은 다르지만 적어도 경기장 안에서는 같은 룰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스포츠 자체를 직업으로 삼고 성장하는 ‘엘리트체육’과 일상생활과 공존하는 ‘생활체육’은 같은 듯 다른 형태를 가진다. 대한민국의 체육계는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프로와 아마추어, 그 모호한 경계에서 균형을 찾기 위한 방법과 노력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생활스포츠와 전문스포츠, 그 사이 어디쯤


남상우 / 충남대 스포츠과학과 조교수


  지금껏 익숙하게 사용해왔던 ‘생활체육’과 ‘엘리트체육’ 용어부터 정리해보자.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을 수는 있으나, 재작년 8월 10일 「스포츠기본법」이 공포됐고(이하 기본법), 작년 6월부터 시행됐다. 생활체육은 “생활스포츠”로, 엘리트체육은 “전문스포츠”로 정의되고(제3조) 이 글 역시 해당 정의를 사용한다.

 
 

생활스포츠와 전문스포츠란 무엇인가

  정의와 특징부터 살펴보자. 두 개념에 대해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느낌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생활스포츠’는 말 그대로 우리 일상에서 잔잔하게 진행되는 스포츠 활동 같고, ‘전문스포츠’는 뭔가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느낌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된 ‘기본법’도 그와 비슷하게 정의했다. 생활스포츠는 “건강과 체력 증진을 위해 행하는 자발적이고 일상적인 스포츠 활동”으로, 전문스포츠는 “선수가 행하는 스포츠 활동”으로 말이다. 이 기본적인 정의에서 우리는 두 영역의 특이성을 읽어낼 수 있다.
  생활스포츠는 기본적으로 ‘평등주의(Egalitarianism)’를 기반으로 한다. 선택받은 소수가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스포츠 활동이 주는 ‘혜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이 담긴 세계다. 혜택의 종류는 다양하며 대표적으로 건강이 거론된다. 꾸준한 운동은 건강으로 이어진다. 덧붙여, 어울림 기회와 즐거운 경험 제공도 따르는데 배드민턴이나 조기축구 또는 수영 등의 스포츠클럽 활동을 하며 사람과 사귀고, 기술 발달 같은 ‘앎의 즐거움’을 얻는다. 하지만 필자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혜택은 규칙적인 스포츠 활동이 제공하는 ‘자기 통제감’이다. 내가 내 삶을 관리하고 통제하며 ‘잘 살고 있음(웰빙)’을 느끼게 해 삶의 만족도를 높인다. 생활스포츠가 정책적으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대로 전문스포츠는 ‘능력주의(Meritocracy)’ 중심으로 움직인다. 나는 전문스포츠가 유지되는 핵심 기제를 네 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 ‘선택’ 기제. ‘엘리트(Elite)’란 개념 자체가 ‘신에 의해 선택된’이란 의미를 지녔다.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선수는 신체적·정신적·기술적으로 우수한 소수의 선택받은 자다. 두 번째, ‘차별’ 기제. 전문스포츠는 차별해야 발전한다. 능력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연봉·지위·리그·대우 등을 통해 노골적으로 차별된다. 세 번째, ‘경외감’ 기제. 경외감이란 ‘공경하면서 두려워하는 감정’이다.
  전문스포츠는 일반 국민이 선수들의 엄청난 경기력에 감동과 존경심을 느끼게 하고, 그 수준에 도달하기까지의 고통스러운 과정에 두려움을 느끼게 해야 존재의 정당성을 입증 받는다. 네 번째, ‘대리효과’ 기제. 국가대표는 국가를 대리해 전 지구적 군비 경쟁의 효과를 입증하고, 전국체전은 지역을 대리해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른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 대가로 국가와 지역이 얻는 효과다. 이 효과가 반감되면 전문스포츠는 쇠퇴한다.


두 스포츠 세계의 '상보적' 관계


  생활스포츠와 전문스포츠 발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국가다. 경기장이나 코치와 같은 인프라 구축·관련 정책·재원 투자 등을 국가가 전담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왜 생활스포츠에 세금을 투입할까. 대표적으로 의료비 절감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규칙적으로 운동에 참여하면 건강해진다. 매년 국가 예산 600조 가운데 30~40조가 의료비로 지출되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어린 시절부터 스포츠 활동을 ‘생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실제로 주 2회 이상 꾸준히 생활스포츠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의료비를 연평균 35만 원 정도 덜 지출한다. 국가 입장에선 큰 이득이다.
  전문스포츠는 결이 다르다. 국가가 전문스포츠에 거금을 쏟아 붓는 이유는 ‘국가홍보’와 ‘국위선양’이다. “올림픽 시상대 맨 꼭대기에 자국의 깃발을 꽂는다(National flag on the top of the podium)” 국가의 전문스포츠 육성은 이 한 문장으로 설명된다. 물론 이처럼 전문스포츠의 국가주의 경향으로 인한 폐해 때문에 최근 「국민체육진흥법」에서 ‘국위선양’이란 문구가 삭제되긴 했으나, 그렇다고 전문스포츠 육성의 국가적 당위성에서도 사라진 건 아니다. 국민통합, 국가적 자부심 고양처럼 멋진 이유도 많지만, 그것도 성적이 좋아야 가능해진다.
  중요한 건 이 두 영역의 관계다. 두 세계가 따로 떨어져 작동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서로는 상보적이다. 서로 돕는다는 의미다. 이를 기반으로 스포츠정책 분야에선 두 가지 ‘명제’가 정설화됐다. 첫째, 생활스포츠 저변 확장이 전문스포츠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것 그리고 결국 다시 돌아 전문스포츠 성공이 생활스포츠 활성화에 기여한다는 명제로 말이다.
  첫 번째 명제를 ‘분수효과(Trickle-up)’라 한다. 밭이 좋으면 열매가 좋아진다는 원리로, 사람들이 특정 종목을 즐기면 그중 뛰어난 선수가 나올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이는 그 선수가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다시 생활체육 참여 인구 증가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후자는 ‘낙수효과(Trickle-down)’ 효과다. 예를 들어, 김연아 선수의 올림픽 금메달은 전국의 피겨스케이팅 붐으로 이어지고, US오픈 대회에서 권순우 선수의 좋은 성적은 전국의 모든 테니스장을 붐비게 한다. 이를 ‘전시효과’ 혹은 독일 테니스 전설의 이름을 따 ‘보리스 베커(Boris Becker) 효과’라 부르기도 한다.

 

생활스포츠로의 전환, 그 기로에서


  우리나라는 출발부터 전문스포츠 중심이었다. 가난했던 70년대, 나라를 해외에 홍보하려는 차원에서 전문스포츠가 ‘국가홍보’ 도구로 인식됐기 때문이었다. 당시 1인 국민 소득이 200불밖에 안 되던 나라를 아는 곳은 없었다. 그런데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같은 대회는 전 세계적으로 방송이 되고, 해당 국기를 달고 뛰는 게 아닌가. 곧바로 인적자원이 가장 확실한 학교를 중심으로 운동부가 육성되며 전문스포츠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국가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라’라는 사명이 집단적 멘탈리티로 작동했다. 그렇게 우리의 전문스포츠는 기형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평등주의적 목소리가 커지면서 전국적으로 ‘동호인 정책’이 시행됐다. 현재 생활스포츠 저변을 차지하는 체육동호인이 그때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문제는 이 동호인이 40대 이상의 남성 중심으로, 실력 있는 사람 중심의 선별적 모집이 이뤄지며 폐쇄적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운동을 처음 하는 사람들은 들어가기 힘든 곳이다. 나아가 지자체나 의회를 압박하며 특정 시설을 독점하며 공공체육시설을 사유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우리나라에서의 생활스포츠는 ▲어릴 땐 민간 영역에서 ▲학교에 들어와 체육수업에서 ▲대학 때 거의 끊기고 ▲직장인이 되는 30대 중후반부터 동호인에서 즐기는 형태로 기형화됐다.
  결국 정부가 칼을 뺐다. 전문스포츠는 너무 성적 중심으로 가고, 생활스포츠는 지나치게 소수에 집중된 기형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였다. 해법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적이고 공공성이 강한 ‘스포츠클럽’ 정책이었다. 방향성은 명료했다. “우리 동네 스포츠클럽에서 올림픽 시상대까지” 전문선수 육성의 핵심 조직인 학교운동부도 이제 스포츠클럽(전문스포츠반)으로 옮겨진다. 그렇게 우리나라 스포츠계는 전문스포츠 중심에서 생활스포츠 중심으로 저울추가 조금씩 기울어지는 중이다. 최근 다양한 스포츠 관련 예능이 TV 화면을 수놓는 경향성 역시 이러한 저울추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봐도 좋다.
  중요한 건 이 두 세계 간의 조화다. 생활스포츠의 부흥은 전문스포츠 발전의 기반이 된다. 전문스포츠에서의 성과는 생활스포츠 붐으로 이어진다. 앞서 언급했듯, 이 두 세계는 상보적으로 성장한다. 안타까운 점은, 현 정부 들어 다시 전문스포츠 중심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지난 2020도쿄올림픽 16위는 국가 정책이 엘리트체육을 소홀히 한 결과라는 일명 ‘전문스포츠 소외론’을 들이대면서 말이다.
  좀 더 침착할 필요가 있다. 16위의 성적이 ▲인프라 ▲인구 ▲정책 ▲재정 ▲문화 ▲세계화 등의 여러 변수에 비춰볼 때 이상한 성적일까. 그렇다면 현재 인구구조 변화를 고려할 때 전문스포츠 중심의 정책으로 회귀하는 건 이 세계를 지속하게 만드는 방법일까. 질문을 던지며 생활스포츠와 전문스포츠의 조화를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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