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주 / 문화연구학과 석사수료

 

본 지면은 교내·외 대학원생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소통의 장’을 열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됐다. 이번 호에서는 오랜 연인과의 이별, 그리고 현실의 암담함 속에서도 소중한 주변 사람들을 버팀목으로 삼아, 기나긴 학위과정을 이겨나가고자 하는 다짐을 담았다. 이를 통해 독자들 또한 지치고 힘든 학업 속에서도 굳건하게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을 찾아보길 바란다. <편집자 주>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김한주 / 문화연구학과 석사수료


  재작년 9월, 첫 직장을 퇴사하고 석사과정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당시에는 학부 4학년 때부터 2년여간 만나던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석사과정 2학차 시작과 동시에 이별을 맞이했다. 평생 잊지 못할 첫사랑이라고 생각한 사람이었지만 기억은 벌써 많이 흐려졌다. 나빴던 기억들은 미화되고, 좋았고 고마웠던 기억이 주로 남아있다. 거기에 미안하게 행동했던 내 모습이 얹혀가는 듯했다. 최근 이사하면서 진즉에 버렸어야 했던 사진과 편지 같은 흔적을 모두 정리했다. 2년 전의 과거가 이제는 아예 없었던 일처럼 사라지기를 바라던 중,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당시 감정이 떠올랐다.

 

 
 


2년 전, 이별 직후


  하루를 아무 의미 없이 흘려보내던 시간이 있었다. “헤어짐을 이해한다,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라고 말하곤 했지만 실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헤어지기 전 당시에 싸한 느낌이 있었는데, 그 느낌은 사실이었다. 상대는 이미 이별 그리고 또 다른 인연을 동시에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안했던 느낌을 꾸역꾸역 확인하고자 했던 스스로가 한심했고,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던 시간을 후회하곤 했다. 차라리 몰랐다면 어땠을까. 만약 모든 때마다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어땠을까 자책하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간을 지우고 싶었다. 그러면서 내가 겪은 아픔만큼 상대에게도 평생 각인되기를 바랐다.
  그런 헤어짐을 겪었던 작년 3월은 석사과정 2학차가 시작되는 때였다. 당시에는 코로나19로 비대면 수업이 이뤄지는 때였지만, 선수과목 포함 5과목의 수업을 수강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코로나에 걸려 치료받았고, 결국 석사과정 4개 학기 중 가장 좋지 않은 성적을 받은 학기가 됐다. 무엇을 그렇게 잊고 싶었는지 코로나 완치 후 공부는 뒷전이고 한동안 매일 술에 빠져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서 술을 잔뜩 마신 채 인천에 있는 본가로 향한 날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한껏 취해 어떻게 집으로 향했는지도 모른 상태로 집에 겨우 도착했었다. 친구와 전화하면서 집에 오지 않았더라면 길바닥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지 모를 정도로 정신을 잃었던 날이었다.
  다음 날 내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엄청 서럽게 울다 지쳐 잠들었다는 이야기를 부모님께서 해주신 직후 친구가 전화를 해왔다. 어제 내가 울며불며 소리 지르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해 걱정이 컸다며, 드라이브 가자는 제안을 해왔다. 친구와 강가에 가서 자전거를 타고, 노래 부르며, 커피도 마셨다.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루를 보냈다. 그날 흐르는 강바람에 실린 수 마디 대화들로 나는 위로받았고, 친구의 제안에서 따뜻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한동안 지나간 ‘나름의 최선’은 어디에도 닿지 않았고, 하루하루 답답해하며 시간을 보냈다. 무언가를 해야만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그마저도 못한 채 시간이 지나갔다. 그러다 보니 한 달 혹은 일주일이라도 어디든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크게 들었다. 이후로도 마음 편하게 여행 다니면서 연극하고 놀았던 날들을 무엇보다 그리워하며 보냈다. 뒤돌아보니 석사과정 3학차가 끝나있었다.

20대의 마지막

  석사과정 네 번째 학기가 시작되기 전인 올해 1월에 취업하게 됐다. 전공과 연결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학업과 병행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는 직장이었다. 게다가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에 큰 고민 없이 일을 시작했다. 그 회사에서 일과 학업을 병행하던 중 한 여성분을 소개받았다. 여러 번의 만남을 거쳐 많은 대화를 했지만, 그분에게 나는 이제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학생이었을 뿐이었다. 더 이상의 만남은 이어지지 않았고, 한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석사과정을 수료하게 됐고, 이직도 했다. 지금은 전공 관련 공공기관에 근무하면서 인턴 생활을 하고 있다.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는 시간을 보내던 중, 소개팅을 했던 여성분에게 카톡을 받았다. 생일 축하한다는 연락이었다. 연락하지 않았던 두 달간의 안부를 서로 물으며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다시 연락을 이어가다 오랜만에 만나 시간을 보냈다. 같이 맥주를 마시며 이전에 하지 못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올해 4월부터 이어졌던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었던 시간임과 동시에 20대 끝자락에 처해있는 내 현실적인 상황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시간이기도 했다. 이 감정 역시 앞선 헤어짐과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받아들이기는 싫은 일이었다. 성인이 되고 10여 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제 곧 20대의 마지막을 보내고 30대를 맞이하게 된다.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살아갈 수 있을지 여전히 불안하다. 꿈꾸는 분야에서 자리 잡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석사과정도 마무리하지 못했고 이후에도 학업을 이어가고자 하는 상황에서 불안한 마음은 커져만 간다. 만일 호감이 가는 여자분에게 연락이 왔더라도, 직장이 없는 상황이라면 답장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불안하니까 괴롭고, 괴로움을 견디기 어려워 자리를 잡고 싶어진다. 가까스로 찾은 자리를 공고히 만들고자 아등바등 살아가는 중에도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새로운 인간관계, 더 나은 직장을 찾아서 두리번거린다. 원하는 것들이 자꾸 생기다 보니, 정체된 삶을 답답해하게 됐고 언제부턴가 쉬는 것조차 불안해질 정도가 됐다. 스스로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듯싶다.

아직도 찾지 못한 답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람을 좋아했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그래서 글만으로 담아낼 수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무엇들, 지우고 지워 결국 글로 표현되지 못한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연극·영화 같은 콘텐츠를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연극을 공부하기 시작한 9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사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잃고 싶지 않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소중한 사람들과 멀어져 가는 경험이 많아지게 되는 것 같다. 그렇게 되다 보니 스스로가 흐려져 가는데, 어디에선가 만남보다 헤어짐이 중요하다는 문구를 읽었을 때 슬퍼하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나는 지금 학생과 사회인의 중간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 같다. 연극을 바탕으로 문화를 공부하고자 하는 지금, 특히 무엇이 사람다운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고맙고 미안한 시간이 계속해서 지워지고 기억 속에 쌓여간다. 이 기억들 또한 획득, 보존, 변형, 표현의 과정 중 어딘가에 위치할 것이다. 계속 보존하고 싶은 기억이 있기도 하지만, 시간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은 채 변형시킨다. 사람은 그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지 표현하고자 하는 존재이지 않을까.
  이러니저러니 하다 보니, 나의 나약함을 푸념하는 변명을 담은 글을 쓰게 됐다. 여전히 나는 사람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기억하기 위한 공부를 계속해 나가고 싶다. 그것을 현실화하고, 나 또한 그렇다고 믿고 싶다. 그러기 위해 계속해서 전공 관련 일과 공부를 이어나갈 생각이다.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정답을 마주하기는 어렵겠지만, 스스로 찾지 못하고 있는 답을 내가 언젠가는 찾길 바란다. 그리고 그 길 어딘가에 ‘사랑’도 있기를 꿈꿔본다. 사랑을 바탕으로, 사람이 달리하면 모든 것이 좀 더 나아질 수 있는 세상이라는 믿음 속에서 살아가고 싶다.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갔던 지난날이지만, 사실 다행히도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었고, 그들을 통해 조금씩 열리고 넓혀질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글로 담아내지 못한 무엇을 무대 위로 옮기는 과정. 그 과정을 통해 조금씩 ‘사람살이’를 배울 수 있었지 않나 싶다. 사람 덕분에 사소하게 위로받은 날을 셀 수 없다. 혹자는 낭만이라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도 여전히 사람이 좋고, 사람 사이의 사랑이 있는 삶이 아름다운 세상이라 말하고 싶다. 그런 사랑을 언젠가 꼭 찾을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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