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진 / 국어국문학과 교수

 

신유물론과 운동성

 

  최근 인문학과 문화연구 분야에서 소위 ‘신유물론(New Materialism)’이 또 하나의 새로운 사유 방식으로서 주목을 받고 있는 듯하다. 그 명칭은 외면상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깊은 연계성을 갖는 것 같지만 실은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철학적 사유와 더 밀접한 관계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책상은 자기의 발로 마루 위에 설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상품에 대해서 거꾸로 서기도 하며, 책상이 저절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고 말하는 경우보다 훨씬 더 기이한 망상을 자기의 나무 두뇌로부터 빚어낸다.” 등과 같은 사유를 펼쳤다고 해서 그가 신유물론과 직접 연결된다고 보는 것은 성급하다.

  신유물론의 사유는 시인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까지 소급된다. 그는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를 경유한 들뢰즈의 사유에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생기적(生氣的) 신유물론자’로 분류될 수 있는 들뢰즈가 신유물론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제인 베넷이나 레비 브라이언트 등의 신유물론 논의들은 들뢰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토머스 네일(Thomas Nail) 등의 논문 〈신유물론이란 무엇인가?〉에 의하면 신유물론의 한 부류에 속할 뿐이다. 네일 등의 논문에서는 자크 라캉, 주디스 버틀러를 ‘실패한 신유물론자’로, 퀭탱 메이야수와 그레이엄 하만을 ‘부정적 신유물론자’로 분류한다. 또한 ‘수행적 신유물론’을 가장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영역으로 자리매김하며 카렌 바라드 등의 논저들을 대표적으로 꼽는다.

  국내에서는 몸문화연구소의 《신유물론》, 릭 돌피언과 이리스 반 데어 튠의 《신유물론》, 《문화과학》의 〈신유물론〉 특집 논문들이 발표됐다. 네일 등의 논문에서 주목하고 있는 캐런 바라드의 글은 〈행위적 실재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바 있다. 참고로 토머스 네일의 책 《존재와 운동》을 통해 수행적 신유물론의 한 특징을 감지할 수 있다. 신유물론의 복잡한 지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누엘 데란다, 그레이엄 하먼, 로지 브라이도티, 다나 J. 해러웨이 등의 책들을 읽어볼 만하다. 박준영은 〈수행적 신유물론이란 무엇인가?〉에서 토머스 네일의 《Marx in Motion》이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신유물론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시도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국내에 출간된 신유물론 관련 연구에서 들뢰즈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있지만, 그의 사유에 깊은 영향을 준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의 철학에는 관심을 별로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시몽동이 마르크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어 급진적인 신유물론과 연결시키는 것은 쉽지 않지만 물질과 사유, 개체와 존재의 역동적인 퍼텐셜과 앙상블을 강조한 그의 철학은 다시 검토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신유물론은 마르크스의 테제, 즉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는 선언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운동 중에 있는(In Motion)’ 신유물론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신유물론이 유물론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지, 아니면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의 지적처럼 “늑대의 탈을 쓴 포스트구조주의”에 머물 것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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