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승훈 / 전 안양예술고 교사

삶 속에 문화예술이 녹아들도록 ① 이해와 표현의 영역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비슷한 수준의 문화예술교육을 받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자본에 따라 그 차이는 선명하게 드러나며 이로 인한 문화 격차는 사회적으로 해소돼야 할 문제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에 이번 기획에서는 문화예술교육의 실태를 파악하고, 문화예술교육의 격차를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지 논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이해와 표현의 영역 ② 문화예술교육, 왜 필요할까 ③ 수도권과 지방의 경계 ④ 모두 같은 선에 서기 위해


문화예술교육의 현실


차승훈 / 전 안양예술고 교사


  우리나라의 문화예술교육은 2004년 문화관광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이하 문체부)와 교육인적자원부(현 교육부)가 「문화예술교육 활성화 종합계획」을 수립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2005년에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설립 및 「문화예술교육 지원법」이 제정되면서 제도적 틀이 갖춰졌다. 올해 문체부에서 발간된 「2021 문화예술교육조사」에서는 문화예술교육의 범위와 종류를 ▲국악 ▲공예 ▲연극 ▲만화·애니메이션 ▲디자인 ▲영화 ▲사진 ▲문학 ▲무용 ▲전통문화 ▲음악 ▲미술 ▲융복합(기술/첨단영상/방송, 게임 등과 같은 비예술과 예술의 융합)으로 정의하고 있다.
  국내의 문화예술교육은 학교 교육과정과 사회 교육과정으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학교 교육과정 중 정규 교육과정으로 편성된 예술 교과는 음악과 미술이고, 고등학교 과정에서는 연극도 포함된다. 그 외로 구분되는 비정규 교육과정에서는 돌봄 교실과 방과후학교, 교내 동아리 활동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학교에서는 다양한 문화예술교육을 실시한다. 사회 교육과정은 국가·지자체 예술교육기관, 사립 문화예술교육기관, 생활문화시설 등이 있으며 시민들이 쉽게 문화예술교육에 접근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용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문화예술교육은 국가정책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문체부가 조사한 지난 1년간 문화예술교육 참여율은 전체 응답자 6,027명 중 11.4%인 약 687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그마저도 참여자 중 약 60%가 미술과 음악 분야에만 참여했다. 이러한 시점에서 문화예술교육의 출발이 치열한 사회적 담론화의 과정을 거쳤는가 혹은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통한 완성도 높은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었는가에 대해 따져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렇기에 본고에서는 저조한 문화예술교육 참여 현실과 문화예술교육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빠진 우리나라 문화예술교육의 현실을 고민해 보고자 한다.

 
 

문화예술교육이라는 이데올로기


  문화예술교육은 문화교육과 예술교육의 합성어다. 때문에 의미와 개념이 다소 모호할 수 있다. 문화교육과 예술교육 각각의 용어에도 한계성과 모호성이 존재해 논쟁적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본고에서는 이에 대해 다루지 않으려 한다. 보편적 개념에서 문화교육과 예술교육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갖는다. 문화교육은 사회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공동체 의식의 함양, 개인의 반성적 성찰을 목적으로 삼고 있으며 정규교육 과정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예술교육의 목적은 창작과 표현을 통해 예술적 능력과 창조적 능력을 기르고 감각과 감수성을 심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종합해보면 문화예술교육은 예술적 이해와 능력을 기르고, 타자와 타자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올바르게 수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문화예술교육은 현재 공교육 체제가 가진 한계를 보충해주고, 개인의 자율과 다양성을 지향한다. 하지만 철학자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이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사물을 상징화한다는 것은 그 사물을 억압하는 것과 마찬가진데, 이렇게 상징화하는 과정 자체에 폭력적인 면이 있고 이 폭력은 다양한 차원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문화예술교육의 출발은 마치 문화와 예술로 개인을 완성시키고, 타인과 올바른 교류를 할 수 있는 주체를 만드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문화예술을 통해 더욱 창의적인 인재를 양성하고 사회에 이바지하게 만든다는 목표가 숨어있는 것이 아닌지를 사유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유는 학교 문화예술교육이 대학입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과 올해 상반기 통계청에서 발표한 지난 1년간의 문화예술교육 참여율에서 35세 이상의 중년과 노년층은 사회 문화예술교육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평균 6.2%라는 현저히 낮은 참여율을 보인다는 것에서 비롯됐다.
  문화예술교육이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해 교양 있는 시민을 만드는 데 이바지하고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또한 예술에 소질과 적성이 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예술중점과정을 설치해 음악, 미술 등의 분야를 심화 교육하기도 한다. 더불어 지역에 따른 문화 격차를 해소하고, 문화예술교육에 종사 가능한 전문 인력도 양성한다. 이렇듯 정부는 문화예술교육의 활성화를 위해 분명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자꾸만 스테판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의 시학에서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에 관한 글 중 발견한 문장이 머릿속을 맴돈다. “근대인은 상상하는 것을 업신여긴다. 하지만 예술을 써먹는데 전문가인 그들은 각각의 예술이 환영이라는 특별한 역량이 분출하는 곳으로 자신들을 이끌어주길 바라며, 그래서 그 점에 동의한다” 즉 예술을 폄훼하지만, 결국 예술이라는 장르를 통해 대중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끈다는 말이다. 문화예술교육의 저조한 참여율과 성과에 치중된 현실이 다소 폭력적인 방식으로 문화교육과 예술교육을 소외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더불어 이미 문화예술은 특정한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진짜는 존재하지 않는가


  필자는 예술고등학교와 예술대학을 졸업했고, 모교인 예술고에서 강사와 교사로 일하며 꽤 오랫동안 학생들에게 예술을 가르쳤다. 더 나은 수업을 위해 예술론과 예술철학 등을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고, 이를 통해 몇 가지의 분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중 하나가 예술은 교양 있는 시민을 양성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역사에 남는 예술작품은 교양을 건너뛰고, 사회질서에 제동을 걸며, 평범한 시민은 엄두도 내지 못할 발칙한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이에 프랑스 고등학교 졸업 시험 문제 중 하나를 가져와 봤다. “예술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운가?” Yes or No로 답하는 문제가 아니다. 예술작품에 대한 다양하고, 경계 없는 사유를 요구하는 문제다.
  현재 실시되고 있는 문화예술교육은 지속되고 확대돼야 한다. 다만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사회에 이바지하는 ‘도구로서의 인간’을 양성한다는 목적에서 완전히 벗어날 필요가 있다. 진짜 문화예술교육은 없을 뿐더러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와 예술을 교육받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기술과 수단이 아닌 이해와 표현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과 표현하는 ‘다양한’ 방식을 소개받을 수는 있다. 여기에서 그친다면 문화예술교육은 상징화되고, 이데올로기화돼 문화와 예술을 소외시키게 된다. 자신만의 이해방식과 표현방식으로 ‘세상을 향한 더 많은 창문을 갖게 만드는 것’이 현재 문화예술교육보다 한 차원 나은 방식이 아닐까. 필자의 아둔한 사유보다 더 나은 사유, 더 나은 의견들이 공론화돼서 문화예술교육 현장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근본적 변화가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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