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운택 /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

[영화 같은 삶, 우리의 미래는]
영화 속에서만 보던 일들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빙하가 녹아 동물들이 살 곳이 없어지고, 이상기후로 인해 사우디아라비아 사막에 눈이 쌓이기도 했다. 이번 기획에서는 공상과학영화에서 그려낸 다양한 형태의 디스토피아를 살펴보고자 한다. 어쩌면 그리 머지않은 미래, 우리네 삶의 종착지일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마주하면서. 이를 극복해 낼 수 있는 방도와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무엇인지 고민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변화하는 지구에 미래가 있을까 ②지구에 마실 물이 없어진다 ③무서운 건 바이러스인가 사람인가 ④인공지능의 책임과 윤리적 잣대


사회적 회복력과 ‘안티 프레질’

임운택 /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

  4월 24일 기준, 코로나 신규 확진자는 6만 4,725명으로 나흘째 10만 명 아래의 수치를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사회적 거리두기’의 전면 해제가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엔데믹으로 전환됐느냐에 대해 여전히 전문가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감염의 확산이 둔화되고, 사망률 또한 낮아지면서 그간 사회의 가장 필수적 요인인 소통을 가로막았던 ‘사회적 거리두기’가 전면 해제되기에 이르렀다.
  호흡이 곤란한 특수한 상황에 직면할 때 비로소 일상에서의 자유로운 숨쉬기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처럼, 많은 사람이 사회적 거리두기의 중단과 함께 일상 회복에 따른 자유를 기대한다. 그러나 반복되는 역사가 없듯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의 회복은 이미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미 코로나19로 국내외적으로 모든 사회는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렀기 때문이다.


돌아올 수 없는 과거, 달라진 현재


  코로나19 발생 이후 4월 24일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6백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으며, 국내에서만 2만 2,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인구 규모로만 보면 우주전쟁이 발생한 것도 아닌데 불과 2년 동안에 웬만한 대도시 몇 개가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들은 결코 회복될 수 없다. 회복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희망의 좌표일 뿐 영원히 채울 수 없는 탄탈로스의 형벌 같은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어떠한가. 저마다의 환경에서 많은 사람이 일상성의 회복을 위해 더 많은 고통의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
  우선, 감염의 직접적인 위협으로부터 살아났지만 코로나19 확진자나 치유자의 상당수가 우울증과 정서불안에 시달리고 있는데, 일상의 회복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사회적 치료와 치유의 주체는 오히려 ‘국가’로부터 ‘개인’의 책임으로 약삭빠르게 전가됐다. 심지어 소외된 이들의 보편적 복지를 위한 공공의료법인 설립과 의료인 공급 확대 논의는 지체돼도, 코로나로 피해를 본 민간의료인의 구제는 전광석화처럼 이뤄졌다.
  그 와중에 거리두기의 가장 큰 피해자인 중소상인과 경제위기로 심화된 노동시장의 양극화, 그리고 그로 인한 소득의 격차는 기존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더욱 기울어지게 했다. 신한은행이 4월 5일 발표한 「2022 보통사람 금융생활 보고서」에는 지난해 9~10월 전국 만 20~64세 경제활동자 1만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가구 소득 하위 20% 구간의 월 평균 소득은 전년대비 2만원 감소해 181만원으로 나타났다. 반면 상위 20% 구간은 53만원 증가해 948만원으로 조사됐다. 이처럼 소득격차가 더 확대된 것이다. 더불어 사회적 거리두기로 집안활동이 늘어나면서 돌봄노동의 과잉에 시달리는 여성, 집안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가정폭력과 아동학대는 일상 회복의 미명 아래 다시 개별 병리적 현상으로 다뤄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비단 어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학교에서 교우관계를 통해 기본적인 사회화를 체득하는 학생들은 2년 동안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면서 소통하는 법도 잊어버리고, 무엇보다 빈번한 수업결손으로 경제적 격차에 따른 학력 격차마저 심각해졌다. 작년 11월 정부가 시행한 「국가 수준 학업 성취도」에 따르면, 중고등학생에게서 기초학력 미달 학생 비율이 매우 큰 폭으로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3 영어 기초학력 미달 비율은 재작년 3.3%에서 7.1%로 3.8%포인트 증가했으며, 특히 지역별로도 큰 차이를 나타냈다. 중3 수학 기초학력 미달비율은 대도시가 11.2%, 읍면지역이 18.5%로 학력 격차가 코로나로 인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확인됐다.
  코로나 블루로 인한 사회적 일탈현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코로나19 발발 이후 정치인들은 각종 사회문제란 곧 국가의 문제이자 책임이라고 말하며 특히 선거 기간 동안 국가재정문제에 대한 고민은 논외인 것처럼 떠들었다. 하지만 코로나 확산이 잦아들면서 방역의 후과로 인플레이션이라는 달갑지 않은 계산서가 청구될 조짐이 보이자, 그들의 태도는 급변했다. 재정 건전화 논의를 이유 삼아, 다시 선별적 구제대책과 일상회복 비용 및 혜택을 선택적으로 다루려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병이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 수술대에서의 고통보다 더 격심한 것은 회복기이다. 마취가 풀리면 극심한 고통의 시간이 찾아온다. 회복기에 치유를 잘못하면 다시 치명적인 중병으로 이어질 수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그와 유사하다. 방역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람들 사이의 공간적 거리두기를 넘어 경제적, 심리적, 문화적 격차로 이어졌다. 따라서 소위 K방역의 성과는 의료적 차원에서만 바라볼 일이 결코 아니다. 병역의 진정한 성패는 방역이 남겨놓은 사회적 상흔과 갈등을 얼마나 잘 치유하느냐에 달려있다.

 
 


정부의 올바른 역할 필요


  여기서 다시 국가의 역할이 요구된다. 코로나19가 남겨놓은 상흔과 갈등을 사회가 온전하게 회복하려면 적지 않은 비용과 갈등조정이 필요한데, 이러한 지원과 역할은 근대국가의 탄생과정에서 주어진 책무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지구상의 국가 대부분이 이러한 일을 제대로 해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재난의 프랙탈(Fractal) 구조를 보면 재난을 ‘재난스럽게’ 만드는 것은 재난의 위기관리와 같이 국가를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은 위험에 직면한 삼류 정치인들이나 관료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고, 상상력이 결핍된 채 위협을 과소평가하고 실현 가능성이 없는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자기합리화와 잘못된 정치적 선택을 하면서 역사상 존재했던 다양한 재난의 확산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코로나19의 경우, 우리는 도널드 트럼프, 보리스 존슨 등이 재난의 예방은커녕 오히려 확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을 보았다.
  그렇게 보면 사회의 회복력을 돕고, 갈등을 조정하는 국가의 책무와 역할이 자동기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다른 모든 재난과 마찬가지로 방역보다 어려운 과제는 방역 이후 사회의 회복력을 되찾는 것인데, 이를 지원하는 국가의 역할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최소한 회복 재생력을 갖춘 구조’ 즉, 위기에 오히려 더 강한 사회적·정치적 구조를 의미하는 ‘안티 프레질(Anti-Fragile)’의 사회 위에 기반할 때 가능하다. 자본주의 역사과정에서 끊임없이 유지되고 있는 국가와 사회의 긴장관계는 그러한 점에서 더욱 건강하게 유지돼야 한다. 그래서 ‘검수완박’처럼 재난극복과 상관없는 정치의 폴리테인먼트(Politainment)가 공론장을 혼탁하게 만들수록 시민사회의 합리적 소통 네트워크를 통해 안티 프레질 사회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재난의 회복과정은 더 깊은 상흔을 남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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