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 / 문예창작학과 박사

 

『한국 시간여행 드라마의 놀이성 연구-2010년 이후 방영 작품을 중심으로』 김은경 著 (2021, 문예창작학과 박사논문)

본 지면은 학위 논문을 통해 중앙대 대학원에서 어떤 연구 성과가 있는지 소개하고, 다양한 학과의 관점을 교류하고자 기획됐다. 이번호에서는 문예창작학과 김은경의 박사논문 『한국 시간여행 드라마의 놀이성 연구-2010년 이후 방영 작품을 중심으로』를 통해 하나의 방법적 체계로 진화한 ‘시간여행’을 분석하고 그 양상을 규명하고자 한다.

 

 

시간여행 드라마, 치유와 향유의 경계 위에서

 

  고대부터 현재까지 시간과 관련한 모티프는 이야기의 소재 및 주제에 꾸준히 관여돼 왔다. 특히 19세기 후반 문학에서 구축된 시간여행 서사는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영상 콘텐츠로 그 영역을 확장해 간다. 미국에서는 영화로, 일본에서는 애니메이션으로 그 진가를 발휘한 시간여행 서사는 2010년대 이후 한국 TV 드라마에도 적극적으로 수용된다.

  1995년 MBC 드라마 〈압구정동 황진이〉를 시작으로 15년 동안 단 네 편에 불과했던 시간여행 드라마는 2012년 한 해에 MBC 〈닥터진〉, SBS 〈옥탑방 왕세자〉 등 총 다섯 편이 방영될 만큼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에 작년까지 제작된 작품은 총 스물아홉 편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본 논문의 심사 이후인 올해 상반기만 해도 시간여행 서사를 근간으로 한 tvN 〈철인왕후〉, JTBC 〈시지프스〉, KBS2 〈안녕? 나야!〉, OCN 〈타임즈〉가 연이어 방영될 만큼 해당 소재의 양적 팽창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가파른 수적 증가와 더불어 나타난 한국 시간여행 드라마의 질적 향상은 하나의 경향적 징후로도 감지된다. 초기 시간여행 드라마가 단조로운 형식의 재현에 그친 것과 달리, 2010년대에는 체계적인 서사의 축적이 진행되면서 이것이 하나의 장르적 영역으로 인식될 만큼 그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근저에 놀이성과 그에 따른 향유적 효과가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이론적 토대를 통해 시간여행 서사의 경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난제, 시간여행 서사의 개념과 정의

 

  시간여행 서사에 관한 담론이 제기된 것은 19세기 후반 발간된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아서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A Connecticut Yankee in King Arthur’s Court)》(1889)와 허버트 조지 웰스(H.G.Wells)의 《타임머신(The Time Machine)》(1895)으로부터다. 이 두 작품에서 각기 배태된 ‘타임슬립’과 ‘타임머신’은 시간여행 서사의 개념적 기원이 됐으며, 이러한 두 개념은 이후 창작되는 작품들에 있어 이미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때 타임슬립이 예기치 못한 사고 속 변수를 서사의 골격으로 삼고 있다면, 타임머신은 나름의 규칙을 담고 있는 체계 속에서 개연성 있는 경우의 수를 서사의 전제로 삼는다. 이러한 변별적인 내재성으로 인해 타임슬립은 특유의 ‘우연성’을 바탕으로 ‘판타지’와 긴밀하게 결합했고, 타임머신은 ‘필연성’을 바탕으로 ‘SF’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에 일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시간여행 서사의 이 중추적 개념들은 불충분한 기술과 오류를 안은 채 사전에 정의돼 있었으며, 이러한 정황은 몇몇 선행연구물에서도 고스란히 발견됐다. 이에 대한 원론적인 수용은 타임슬립과 타임머신 이후의 후속 개념인 ‘타임리프’, ‘타임루프’와 ‘타임워프’의 명확한 이해와 수용에 차질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본 논문의 목표인 시간여행 드라마의 놀이성에 관한 천착에 있어서도 중대한 결함을 초래할 수 있다. 다행히 필자는 타임머신 개념의 유력한 정의 확정과 타임슬립이 갖는 오류 검토 및 개념 재정립을 통해 시간여행의 후속적 개념에 관한 분석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이때 연구 대상이 된 작품은 총 세 가지로 tvN 〈나인〉, KBS2 〈죽어도 좋아〉, tvN 〈시그널〉이 있다.


적대하는 객체를 타도하기 위해
자의적인 시간여행을 하는 드라마 〈나인〉

 

  2013년 tvN을 통해 방영된 드라마 〈나인〉은 2010년 이후 급속하게 증가한 드라마 서사 속 시간여행의 징후적 경향을 분명하게 제시한다는 점에서 가장 먼저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될 작품이다. 〈나인〉의 주인공은 38세 기자이자 앵커인 ‘박선우’다. 그러나 높은 자유도를 표상하는 그의 직업적 특성은 정작 작품에서 놀이성과 유관하게 구현되진 않는다. 또한 그에게 선고된 교모세포종이라는 뇌질환은 놀이적 충동을 촉구하기 보다는 그 의욕마저 반감시킨다. 마찬가지로 정신질환을 앓는 모친의 입원, 시한부 판정으로 인한 연인과의 잠정적 이별, 무엇보다도 행방불명된 형의 부고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주인공인 박선우가 놀이에 임할 상태가 아님을 환기한다. 하지만 박선우와 시간여행 장치인 ‘향’의 우연하고도 운명적인 조우는 결여와 부재의 상황 속에서 역설적으로 그를 놀이의 주체로 격상시킨다.

  드라마 〈나인〉은 시간을 자유자재로 거슬러 가는 타임리프를 활용해 자신에게 발생한 비극을 선택적 시간으로 해소해나가는 주체의 모습을 담고 있다. 물론 가족사라는 굴레에서 시작해 이를 원인 삼아 주인공이 최후를 맞이한다는 점은 현실지향적 발상에 여전히 구애되고 있는 한국 드라마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홉 개로 한정된 향의 개수와 시간의 우위를 쟁탈하기 위한 경합을 골자로 함으로써 당대 대한민국의 현실을 게임적 시공간으로 치환하고 있다는 점은, 한국 드라마가 선취하지 못했던 놀이적 가능성을 제안하고 있었기에 그 의의가 있다.


시간의 통제를 통해 주체의 운명을
반복적으로 초기화하는 드라마 〈죽어도 좋아〉

 

  2018년 KBS2를 통해 방영된 드라마 〈죽어도 좋아〉는 작품 전편에 걸쳐 타임루프를 배치한 최초이자 유일한 드라마라는 점에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는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죽어도 좋아〉는 안하무인 직장 상사와 그를 개과천선 시키려는 부하직원의 갈등과 분투를 담은 오피스물이다. 기존의 오피스물이 ‘직장’이라는 통제되고 절제된 공간을 배경으로 사실성 부각에 집중했다면, 이 작품은 여기에 의도적인 시간의 균열을 가함으로써 기존의 클리셰와 마주한다. 요컨대 오피스라는 재단된 공간 속에 억류당한 일상을, 일종의 메타적 관점에서 파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적 접근을 통해 이 작품은 기존의 오피스물이 가지고 있는 전형성을 지적함과 동시에, 비선형적인 시간의 재생을 근간으로 직장이라는 곳을 놀이적이고도 게임적인 공간으로 격상시킨다.

  이 가상의 공간에서 인간의 죽음과 이로 인한 두려움은 언제든지 극복 가능한 하나의 유희로 치환된다. 동일한 시간을 얼마든지 반복할 수 있다는 타임루프만의 독자성이 만들어낸 결과인 셈이다. 아울러 이러한 극단적인 시간의 통제성은 주체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에 두려움 없이 적응 및 학습하고 성장하면서 목표에 도달하도록 만든다. 〈죽어도 좋아〉의 주인공 ‘이루다’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타임루프 속에서 상사의 악행뿐만 아니라 자신의 단점을 교정하고 회사의 부당한 지시에 맞서며, 당연하게 여겼던 당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항하는 존재로 거듭나고 있었다.

과거의 존재와 현재의 주체가 소통하며
갈등을 봉합해 나가는 드라마 〈시그널〉

 

  마지막으로 2016년 tvN을 통해 방영된 드라마 〈시그널〉은 이전까지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구현된 바 없었던 ‘타임워프’라는 놀이 지향적 모티프와 ‘장기 미제 사건’이라는 현실 지향적 모티프의 접목을 시도한 최초의 작품이다.
  〈시그널〉은 시간의 왜곡으로 과거나 미래가 뒤섞여 나타나는 타임워프를 활용하는데, 그 과정에서 실존했던 강력 범죄와 함께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들을 주체들이 순환적 시간을 통해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승자와 패자의 경계적 구분과 보상에 대한 구체적 형상이 시간여행 장치인 ‘무전기’와 특정 시간인 ‘11시 23분’으로 반영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 역시 놀이가 가지는 특수한 시공간적 입지를 확보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전 작품들에 나타난 시간여행의 경위가 지극히 주체의 사적 욕망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면, 〈시그널〉은 실재했던 국민적 사건을 대상화함으로써 시간여행의 명분을 공감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작중에 등장하는 타임워프는 과거에 남겨진 회한과 과오를 평행세계와 대체시간을 통해 교정하고 치유함으로써, 현실 그 자체를 놀이 안으로 수렴한다. 이는 단순히 일상 안에서 경험할 수 없는, 동시에 놀이만으로는 체험할 수 없는 정서를 시청자에게 선사한다는 점 그 자체로 절대적인 입지를 부여받는다. 현실과 가상을 모두 압도하는 시간여행의 수용적 원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