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합리적’ 차별
 

  2016년 말, 대한민국은 뜨거웠다.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시국선언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졌고 대학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모두가 부정당한 민주주의에 문제를 제기하며 역사적 순간의 주인공으로 자리했다. 다만 난데없이 그 ‘배역’을 빼앗기는 일이 생기기도 했는데, 그 타깃은 주로 지방대 학생들이 됐다. 여느 대학생처럼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시국선언에 동참했지만 돌아온 것은 조롱과 비웃음이었다. ‘지잡대’는 분수를 알고 조용히 하자는 식의 댓글이 다수 달리며 SNS상에서 화제가 된 것이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의 학벌주의 문제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다. 더는 놀라울 것도, 새삼스러운 것도 없다. 대학이라는 타이틀로 타인의 이미지는 물론, 자신의 정체성마저 확립해 차별과 혐오를 드러내는 현상은 ‘노력’이라는 단어로 희석돼 정당화되기까지 한다. 특히 명문대에 들어가기 위해 공들인 시간을 전 생애에 걸쳐 보상받고 싶어 하는 개인과 이를 부추기는 사회가 ‘공정성’이라는 좋은 방패막을 찾자, 그들에게 더 이상의 논의는 사치에 불과했다.
  최근 들어 이러한 학벌주의 이슈가 다시금 수면 위로 올라왔다. 숙원 사업 중 하나인 ‘차별금지법’에 대한 발의가 진행된 가운데, 학력을 이유로 하는 차별은 항목에서 제외하자는 의견이 교육부로부터 나오자 잡음이 생긴 것이다. 학력은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부분이 아닌 “개인의 선택과 노력에 따라 상당 부분 성취 정도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합리적 차별 요소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라는 이유를 들면서, 이를 법률로 규제하는 건 과도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합리적 차별’이라는 표현이 주는 이질감은 그 발화 주체가 학벌주의를 누구보다 경계해야 할 교육부라는 사실과 맞물리며 큰 모순을 빚어냈다. 이제 ‘노오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한물간 신화처럼 여겨지곤 한다. 그럼에도 학력이 개인의 의지로 극복될 수 있다는 주장은 다시금 이에 얽힌 다양한 구조적 문제를 쉽게 지워버리고 만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대입 시험은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무언가로 여겨진다. 그에 따라 결국 모든 교육은 해당 시험에 초점이 맞춰진 채 흘러가는데, 이번 사태는 이 기형적인 형태에 재차 힘을 실어준 셈이다. 개인은 사회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상 온전히 순수한 주체로서 존재할 수 없으며, 환경 등에 의해 매번 다른 출발선과 돌부리를 만나게 된다. 이에 학력이라는 라벨을 기준으로 무언가를 시도할 기회 자체가 박탈당하고 배제가 당연시되는 과정은 명백한 차별로 명명돼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부재가 지속된다면, 결국 모든 대화는 하나의 물음으로 시작돼 대다수에게 꽤 이른 끝맺음을 선사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학교 어디 나왔어요?’ 이토록 납작한 물음표 하나에 권력이 기생하고 혐오가 흔적을 남기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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