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기 / 교육학과 박사수료

 

공정한 교육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되돌아보며


이슬기 / 교육학과 박사수료

 

  수능을 향한 한국 사회의 신뢰는 견고하다. 오랫동안 수능은 대입 당락을 판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전형도구였다. 학교생활기록부, 대학별 고사 등 다른 전형자료들의 반영도 확산되는 추세지만, 부정 시험과 고위 공직자 자녀의 입시 비리 의혹 등 일련의 사건이 불거지면서 수능의 비중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 국민 다수의 여론이다. 이런 수능을 향한 믿음은, 객관적인 시험이 가장 공정하다는 우리의 상식에서 비롯됐다. 구소연의 논문은 수능의 공정성에 대한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인식에 반문하며, 공정한 교육을 위해 학교교육이 추구해야 할 것들을 궁리한다. 이 논의에 대체로 수긍하면서 몇 가지 생각들을 보탠다.

  첫째, 토론자 역시 수능이 공정치 않다는 연구자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이 주장에 이르는 논리적인 과정이 연구에서 상당히 생략된 것에 대해선 아쉬움이 남는다.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교육기회가 공정하게 배분돼야 한다는 것에 공감할 것이다. 이때 수능처럼 동일한 사안을 두고도 공정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는 것은, 공정성의 의미를 서로 다르게 정의했기 때문이다. 연구에서 수능의 공정성을 판단하기에 앞서 ‘공정’이나 ‘기회배분’의 의미를 사전에 충분히 다뤘어야 한다.

  기존의 수능 담론에서 공정의 의미는 능력주의 관점에 근거한다는 점을 연구자는 우선 설명해야 한다. 능력주의 입장에서는 시험 점수가 학생의 능력을 가장 잘 나타내는 지표라 전제한다. 그 점수에 학생의 타고난 능력뿐 아니라 가정배경이나 거주 지역, 사교육 등 수많은 ‘운’과 ‘우연’이 작용하더라도, 개인의 실력과 노력이 동반돼야 좋은 결과가 따른다는 것이다. 이에 국가 표준의 시험을 통해 학생 모두를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평가해, 그 성적을 근거로 개인이 향유할 기회의 몫을 정하는 게 공정하다고 여긴다.

  한편 연구자는 롤스(Rawls)와 그에 공감하는 논의들을 따라 공정의 의미를 달리 해석해, 수능, 즉 객관적인 시험이 가장 공정하다는 통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시험을 통해 개인의 ‘온전한’ 능력을 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수많은 ‘운’과 ‘우연’이 작용한 점수를 근거로 교육기회의 몫을 개인에게 돌리는 것은 도덕적으로 온당치 않다는 것이다. 이런 롤스와 선행의 논의들을 현재의 수준보다 구체적으로 서술함으로써, 대입제도에서 ‘다름의 원칙’을 적용한다거나 공정의 의미를 ‘사회적 수준’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이 연구의 주요 논지들이 독자들에게 보다 편히 수용되길 바란다.

  둘째, 수능에 이 연구는 관심을 두고 있으나, 다른 전형방식의 공정성에 대해서도 성찰할 기회를 준다. 가령 학생부 위주 전형은 누적된 교과 성적과 활동을 비중 있게 평가한다는 점에서, 선다형 지필고사에 비해 학생의 수학 능력을 좀 더 ‘타당하게’ 예측하는 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롤스의 ‘공정’의 의미를 적용하면 이런 전형방식도 정의롭진 않다. 학생 모두가 동등한 출발선에 있지 않으며, 개인은 ‘우연한’ 능력에 근거해 교육기회의 몫을 배타적으로 누리기 때문이다. 내신 부풀리기, 상위권 학생에게 스펙 몰아주기, 가식적인 공부와 활동, 사교육 개입, 학교나 지역 격차 등 ‘공정’에 위배되면서도 ‘학교교육을 해치는’ 문제들에 당면하는 것도 여전하다.

  결국 어떤 전형방식(수능이냐, 학생부 위주냐)이 마땅할지 논란하기보단, 공정한 ‘대입제도’에 대한 우리의 상식부터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대입제도가 지금처럼 모든 학생들을 ‘성적으로 줄 세워’ 기회를 배분하는 능력주의 입장을 표방하는 한, 어떤 전형방식으로도 롤스가 말한 ‘정의’를 달성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학생 개개인의 학업 능력을 ‘타당하게’ 평가하되, 진학기회는 ‘공정하게’ 배분하는 대입제도의 큰 틀을 모색하는 논의가 한국 사회 곳곳에서 이어지길 기대한다.

  끝으로 연구자의 논지를 받아들여 공정에 대한 담론을 새롭게 구성해 본다면, ‘학교교육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의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다. ‘학교교육의 정상화’ 담론에서 이야기돼야 할 부분들이 명료해지는 것이다. 학교교육은 성적이 뛰어난 학생만이 아니라 보통의 또는 그 이하의 학생들까지 포용할 사명을 가져야 한다. 누차 말했듯 모든 학생들은 동일한 출발선상에 있지 않으며, 타고났다고 여겨지는 능력 또한 수많은 운과 우연이 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또 시험은 그 성격상 개인의 학력(學力) 중 아주 작은 부분만을 측정할 뿐이다. 이런 능력의 우연성, 시험 자체의 한계를 감안한다면, 성적이 높은 학생들만이 좋은 교육기회를 향유하는 것은 부당하다. 어쩌다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한 다수의 학생들도 교육기회 배분의 구조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때 교육기회의 의미는 연구자의 논의대로 단순한 ‘진학의 기회’가 아닌 ‘학생들이 수업 장면에서 소외됨 없이 교육적 성장을 하는 기회’로 확장될 수 있다. 선별과 변별이 아닌 모두의 성장을, 사익이 아닌 공익을 궁리하는 새로운 학교교육의 정상화 담론에 관심이 모아지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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