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참을 수 없는 말의 가벼움


   언어는 울퉁불퉁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언어는 자칫 절대적으로 보일 수 있는 체제를 확립하는 데에 쓰이며 잘 세공된 채 전시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권력의 또 다른 이름으로 군림한다. 그렇기에 언어는 투쟁과 저항이란 말이 무엇보다 어울리는 개념이 된다. 온전한 주체로서 발화할 수 없는, 주류에 의해 만들어진 언어를 ‘빌려’ 쓰던 자들이 존재하기 위해선 다시금 ‘언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제야 세상을 ‘시끄럽게’ 하기 시작한 이들의 언어는 실로 무겁고 단단하다. 소통 수단이자 글자 덩어리의 의미를 넘어선 그 언어 안엔 인내의 시간이 축적돼 있다. 그럼에도 꽤나 생소한 이 새로운 언어들은 모든 맥락과 의미가 소거된 채 단지 이목을 끌만한 대상으로서 소비되곤 한다. 침묵의 근간을 흔들며 일어났던 ‘미투’라는 단어를 채무 불이행과 관련된 폭로 현상을 지칭하기 위해 ‘빚투’라는 용어로 사용한 사례가 대표 적이다. 미투 운동의 본질은 피해 사실 고백을 통한 연대에 있었지만, 연쇄적이라는 단편적인 성질에만 초점을 맞춰 탄생한 빚투는 그 매듭을 교묘히 풀어버렸다. 나아가 많은 고백과 지지에 스며있던 눈물의 무게를 한없이 가볍게 만들었다.

   이처럼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의 언어에 대한 존중이 실종된 사회에선 많은 ‘말’들이 생겨난다. 그 말은 대상의 본질을 호도하거나 감정적 반응 따위로 점철되기도 하지만 상관없는 듯하다. 최근 한 사건이 ‘제2의 n번방’이라는 명칭으로 이곳저곳 ‘홍보’됐다. 알페스라 불리는 팬픽 문화가 그 주인공이었다. 남성 아이돌의 ‘인권’을 운운하며 시작된 해당 논란은 이내 국민 청원 게시판에 올라왔고, 한 남성 국회의원의 입을 거쳐 n번방 타이틀을 얻기에 이르렀다.

   물론 문제가 된 윤리적 재현에 관한 논의는 분명 고민해봐야 할 사안이며 지금껏 관련 논쟁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알페스 문화에 대한 기본 정보조차 결여된 상태에서 알페스 ‘이용자’ 및 ‘운영자’, 알페스 ‘기록’ 등의 표현만이 난무하는 풍경은 본질을 흐린 채 성착취 사건을 단순히 프레이밍을 위한 도구로써 사용했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또한 지금껏 제기돼 온 아이돌 인권에 대한 문제의식은 여전히 부재한 실정임에도 가해와 피해 구도에만 힘을 쏟는 형태는 더욱 의문을 품게 만든다. 이는 ‘여성 역시 성범죄자’라는 식의 보복성 짙은 의도로부터 해당 논란이 시작됐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결국 알페스 개념을 성착취 사건과 동일 선상에 놓는 행위는 오히려 문제적 현실이 지닌 폭력성을 희석시켰다. 더불어 이 사회가 방관했던 아픔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까지 걸린 세월에 비해 해당 논란에 대한 ‘비상식적인’ 대처가 속전속결로 이뤄진 점은 기성의 권력 구조가 지닌 견고함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비로소 날을 세웠던 언어를 다시금 매끈하게 다듬어 진열해놓는 광경을 목도한 어느 겨울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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