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아영 / 문학평론가

[특집 칼럼] '자유'의 불시착

예술 장르에서 ‘자유’라는 키워드 안엔 많은 의미와 역사가 얽혀있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해당 개념은 자주 논쟁의 중심에 서곤 한다. 특히 변화하는 시대에 걸맞게 새로운 감수성이 필요해짐에 따라 ‘소란’은 계속되고 있다. 이번 기획에선 표현의 자유라는 명제에 집중한 나머지 우리가 놓치고 있는 논의를 조명함으로써, 해당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고민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예술, 욕설, 자유
 

인아영 / 문학평론가

   ‘표현의 자유’란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이 가지는 기본권 중 하나로, 개인이 부당한 억압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그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한 권리다.

   한국의 경우 헌법 제21조 1항에 ‘모든 국민은 언론 · 출판의 자유와 집회 ·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명시해 그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이를 통해 개인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국가 권력이나 제도의 압력으로부터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보호받는다.

   반면 예술계에서 ‘표현의 자유’란 다소 다른 맥락을 가진다. 표현의 자유는 국가 권력이 특정한 방향으로 국민의 의식을 이끌고자 하는 의도 아래,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창작을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행위에 반해 창작의 자유를 보호하는 의미로 쓰이곤 했던 것이다. 이 경우 표현의 자유는 사회의 부당한 폭력이나 부조리를 고발하려는 예술가들의 저항정신과는 옆자리에, 창작자에 대한 검열과는 반대편에 놓이게 된다.
 

‘표현의 자유’ 아래 흐려지는 것들
 

   그러나 최근에는 예술계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개념이 다른 종류의 사안들과 접맥되고 있는 것 같다. 바로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 혐오 표현을 둘러싼 사안들이다. 이를테면 웹툰 작가 기안84가 네이버 웹툰 〈복학왕〉에서 취업 시장에 뛰어든 20대 비정규직 인턴직 여성을 성적으로 폄훼하는 혐오 표현을 담아, 작품 연재를 중단하라는 독자들의 목소리가 이어진 것이 그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해당 에피소드가 게재된 뒤 작가가 고정 출연 중인 예능프로그램의 하차까지 요구하는 반응이 빗발쳤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에 대한 혐오 표현이 동시대 사회에서 얼마나 민감한 촉수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동료 창작자들이 드러낸 입장은 이 사태를 다른 국면으로 이어지게 했다. 독자들이 작품의 연재중지를 요청하거나 플랫폼 차원에서 소수자 보호 규정을 의무화하길 요구하는 것에 대해 이는 검열이나 독재와 같은 행동이라고 잇따라 목소리를 낸 것이다. 특히 그들은 위와 같은 움직임이 창작자의 투쟁으로 쟁취해낸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리는 예술가가 보장받아야 하는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권리를 기존의 국가 권력에 의한 검열 문제가 아니라, 소수자와 약자에 관한 동시대적인 감각의 문제와 연결시킨다. 이로써 ‘표현의 자유’ 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허구적이고 이분법적인 구도를 재생산하고 논의를 비생산적으로 만드는 측면이 있다.

   예술 작품과 혐오 표현에 관한 논의를 창작자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순간, 사안은 단순화될 위험이 있다. 마치 창작자가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를 비하하는 표현 등으로 대표되는 특정한 표현을 썼는지, 혹은 특정한 내용을 소재로 사용했는지 그 여부만이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예술 작품에서 폭력적인 묘사나 혐오 표현은 그 자체로 찬성/반대, 옳음/그름, 긍정/부정의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문제로 삼을 것은 그러한 묘사나 표현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혹은 작품 내에서 어떤 방식으로 활용되거나 기능하고 있는지, 또한 작품 전체의 구조나 주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래서 그것이 작품 외부의 맥락과 어떻게 닿게 되는지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문제는 창작자의 권리라 일컫는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 이는 현안의 핵심을 파악하고 논의를 개진하는 데 잘못된 입구일 수 있다. 도리어 이러한 과정에서 쉽사리 누락되곤 하는 다른 논의들, 이를테면 작품 내에서 특정한 표현이 작동하는 원리나 그것과 연동된 작품의 질적 수준에 관한 고려가 더 중요시된다면, 우린 이를 통해 생산적인 논의를 열 수도 있다.
 

과녁을 벗어나는 혐오 발화
 

   비하나 혐오 표현이 예술 작품 안에서 그 표현 그대로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혐오하는 효과를 발생 혹은 증폭시키는 경우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아이러니를 자아내며 작동하는 반대의 예시를 생각해본다면 어떨까. 일례로 욕설과 관련된 경우를 떠올려볼 수 있다. 욕설은 기본적으로 누군가의 인격을 모욕하거나 폄훼하려는 목적으로 쓰인다. 그런데 욕설은 그것이 모욕이나 폄훼의 언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 욕설이 무엇을 향해 있는지, 그리고 누구를 대상으로 내포하고 있는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예컨대 욕설 중에서는 ‘병신’이나 ‘~년’과 같이 장애인, 여성 등 소수자를 지칭하는 말이 그 자체로 비하의 의미로 사용돼 욕설이 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그렇기에 욕설은 사용되고 표현되는 동시에 바로 상대방을 욕되게 하는 효과를 달성한다. 그러나 예술 작품이라는 맥락 안에서는 욕설이 사용되고 표현되는 것만으로도 모욕과 폄훼의 효과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다. 작품 내에서 이러한 욕설이 작동하는 기능 및 작품의 주제와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그 목적과 효과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예시로 황정은의 〈누가〉(2013)에서 욕설이 쓰이는 방식과 그 효과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젊은 여성인 ‘나’가 지금 살게 된 집을 선택한 이유는 “조용해서”다. 이전에 살던 집에서는 휴대폰 매장 내 “쿵 칙 쿵 칙쿵 직 쿵 직 붕 지 붕 지”하고 틀어대는 누군가의 플레이리스트로부터 차단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기를, 외벽과 내벽을, 집이라는 공간 자체를, 결국엔 몸을 흔들어대는 그 소리 안에 갇혀야 했을 때 ‘나’는 깨닫는다. “이웃의 취향으로부터 차단될 방법이 없다는 거. 계급이란 이런 거였고 나는 이런 계급이었어.”

   여기에서 작가는 정확하게 계급의 문제를 겨냥한다. 돈이 많았더라면 이웃의 무자비한 소음과 취향으로부터 차단될 수 있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이것은 다른 무엇이 아닌 계급의 문제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새집에서도 여전히 이웃의 소음은 ‘나’를 미치게 만든다. 갑자기 들이닥친 윗집 여자는 그 윗집으로부터 시끄럽다며 한 소리를 듣고 와서는 이젠 ‘나’에게 알아들을 수 없게 따져 묻고, ‘나’는 이 광기를 고스란히 흡수해 다른 이웃에게 똑같이 전달한다. 그리고 느닷없이 ‘나’의 집에 찾아와 초인종을 누르는, 알 수 없는 누군가는 “누구세요”라는 물음에 이렇게 말한다. “아래층이야 씨발년아.”

   ‘작가의 말’을 통해 작가는 ‘나’가 남성이었더라도 이 마지막 문장은 “씨발놈아,가 아니고 씨발년아”였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편이 훨씬 무섭고 공격적인 이유라면 그 의미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상대가 여성인 경우, 욕설은 한국사회의 성별 위계와 겹쳐져 훨씬 내뱉기 쉬우면서도 체계적으로 억압적인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마지막에 이르러 “씨발년”이라는 욕설을 통해서 주거의 문제가 ‘계급’뿐만 아니라 ‘계급+여성’이라는 더 구체적인 조건과 어떻게 결부돼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웃으로부터 받는 위협에는 소음과 무차별한 취향뿐만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이유로 표적이 되는 공포까지 포함돼 있음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통해서 나타난다. 여성을 지칭한다는 이유만으로 더 심각한 모욕과 폄하의 의미를 담게 되는 욕설이라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나’가 처해 있는 계급적, 젠더적 조건이 얼마나 구조적 측면에서 억압적이고 폭력적인지 효과적으로 드러내 소설의 전반적인 주제와 완벽하게 맞물리게 되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J.Butler)는 《혐오 발언 (Excitable Speech)》(1997)에서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혐오 표현이 반드시 수신자에게 상처를 주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에 혐오 발화의 효력은 절대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특정한 말이 지니는 의미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한다. 따라서 발화자의 애초 의도에서 벗어나 그것을 저항적으로 해체하거나 전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황정은의 소설 〈누가〉에서 보여준 것처럼 혐오 발화를 전유하고 재수행하는 맥락을 만들어냄으로써 오히려 동시대 한국사회에서 젠더화된 욕설에 담긴 폭력성을 드러낼 수도 있다. 예술 작품에 나타나는 비하나 혐오 표현을 창작자의 표현의 자유라는 관점으로만 바라본다면, 이는 오히려 혐오 발언에 권력을 부여하며 그 효력을 절대화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맴돌지 않고 작품의 구체적인 기능과 효과를 정교하게 질문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조금 더 생산적인 논의의 장을 열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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