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주 /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그곳엔 무엇이 있을까 ④ 지리-신체적 공간의 페미니즘

현실은 온갖 것들로 가득 찬 곳이자 사물들이 끊임없이 이동하고 변하는 철학적·사회적 공간이다. 이 공간 속에서 개개인은 권력으로 구획된 축들의 교차점 위에서 억압하고 저항하며, 생성·작동·소멸한다. 이번 기획에서는 공간의 정치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실천적 의미를 찾아 적용하며 인간의 신체에 이르는 지리학적 정치의 의미를 에둘러 항해한다. 이 글은 김은주(2020) “현장정치와 페미니즘 주체화: 정동체로서 신체와 지리-신체적 공간을 중심으로”, 내용을 주요하게 요약하고 재구성했음을 밝혀둠.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공간에 숨은 정치, 비판지정학 ② 21세기의 한반도와 탈식민성 ③ 국경의 정치학 ④ 지리-신체적 공간의 페미니즘

 

저마다의 고유한 지리와 연결

 
 

   신체와 공간 개념은 근대적 보편 인간 뒤에 숨은 전제를 검토하고 비판하는 페미니즘 이론의 계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버지니아 울프(A.V.Wolf)는 《3기니》(1938)에서 “여성으로서 나에게는 나라가 없다. 여성으로서 나는 나라를 원하지 않는다. 여성으로 나에게 나라는 전 세계다”라 선언함으로써, 여성과 공간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에이드리언 리치(A.C.Rich)는 지구 망명객이자 세계 시민으로서 ‘우리 여성’이라는 인식이 여성들 간의 차이를 삭제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실제로 모든 여성들이 어디에나 갈 수 있는지 묻는다. 로지 브라이도티(R.Braidotti)는 리치의 비판에 동의하면서, 여성 주체의 존재론적 구조인 신체가 안/밖이 분리된 공간 구조로서 설명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공간과 관계 맺는 신체에 대한 주목은 저마다의 고유한 지리에 관해 목소리 내 말할 수 있게 하기에 유의미하다. 무엇보다도 여성 주체화를 모색하는 페미니즘 철학의 지평에서 신체란 바로 복합적이고 유목민적인 정체성이 체현되는 페미니즘 주체화의 자리다.


신체 정신 이분법을 넘어서는 정동체로서 신체

 

   신체가 공간과 관련돼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적 구분, 즉 신체와 정신(마음)의 이분법으로부터 벗어나기가 필수적이다. 이 이항대립은 남성/여성의 대립과 연결될 뿐 아니라, 가부장제가 여성을 고립시키고 나약한 존재로 만들면서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브라이도티는 이러한 근대적 신체 개념을 넘어서기 위해 들뢰즈(G.Deleuze)의 신체론을 페미니즘에 유용한 도구로서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들뢰즈는 신체를 다양한 것들의 복합체이며 변형하는 것으로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신체는 각기 다른 신체들과 무수히 결합을 거듭하며 지속적으로 변이하면서 존재한다. 이러한 변이의 과정은 정동(Affect)으로 드러난다. 신체는 사실상, 신체들 간의 결합과 해체의 관계 안에서 작용하고 영향을 받을 수 있는 힘의 변이들의 최대와 최소이며, 정동의 변이 범위(Scale)와 일치한다. 이러한 신체는 정동의 스케일을 보여주는 작용하는 힘이자 겪어 내는 힘이며, 정동으로 제시되는 힘들의 상태라는 점에서, 정동체(Affect-Capacite/Affect-Capacity)로 명명될 수 있다. 정동체로서 신체는 결합과 변이의 정동을 담아내고 지속된다. 정동체는 연결하면서 연속적으로 작용하는 힘이며, 이는 다른 힘들과의 관계에 따른 변용의 극한을 감당하고 수용하는 바를 드러내는 정동의 용적(Capacity)이다.


신체-공간론: 지리 신체(Geo-Body)적 공간


   ‘정동체로서 신체’는 신체들의 연결에 따른 관계 구조로서의 생성하는 공간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인본주의(Humanism)에 근간한 해부학적 신체를 가리키지 않으며 개인의 신체라기보다는, 다양한 행위자들이 기능하고 변이하는 하나의 장소(Place)다. 따라서 신체와 공간은 불연속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며, 신체는 그저 공간을 체험하는 매개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신체는 공간 구조와 조응해 구조를 변형하고 생산하는, 공간 생성의 장소다. 이렇게 생성하는 공간은 결합한 신체의 능력을 강화하는 큰 집합적 역량의 창출을 일으키면서 계속 다르게 변화하기를 실행하는 새로운 집합적 신체이자, 집합적 정동체다.


   위와 같은 생성의 공간은 공간 생산을 신체에서 해명할 뿐 아니라, 공간을 지리 신체(Geo-Body)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지리 신체라는 용어는 통카이 위니카쿨(T. Winichakul)이 태국의 근대적 국가와 지리적 영토 개념의 관계를 해명하면서 처음 제시했다. 통카이에 따르면, 국가의 영토는 단순히 지구 표면의 크기를 지닌 조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리 신체는 근대 과학적 방법론을 활용해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근대매체로서의 지도에 주목함으로써 등장한다. 그래서 측량화한 지도 그리기(Mapping)의 기술과 그 실행에 따른 수많은 개념, 관행 및 제도, 담론이 빚어낸 공간이 바로 지리 신체다. 베네딕트 앤더슨(B.Anderson)의 《상상된 공동체》(1983)에 영향을 받은 지리 신체 개념은 영토와 관련된 기술과 그에 대한 실행이 빚어낸 공간이다. 기술의 작용에 따른 지리 신체의 작동은 정동체로서 신체가 공간을 생성하는 장소이기에 가능하다. 이제 동시대의 지리 신체의 공간은 문화, 미디어, 체계, 환경, 교통, 법, 인구, 기후 등의 요소가 신체의 변용능력에 물리적 거리와 상관없이 상호작용하는 배치의 효과로 생겨나는 비유클리드적 관계망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지리 신체적 공간은 관계구조 내/외부에 일어나는 자극에 반응하면서 공간 구조를 변이하고 조직한다. 이 점에서 지리 신체로서 공간은 사이버네틱(Cybernetic)한 복합체이자 환경, 문화의 연속적 관계망이다.


현장의 정치학으로서 페미니즘과 지리 신체 공간의 의미

 

   현장의 정치학이자 장소의 정치인 페미니즘에서 공간에 대한 사유는 근대적 공간을 지탱한 전제들과 선을 긋고, 각기 다른 목소리의 위치·현장·장소의 발견과 주목을 통한 힘 기르기로 이어진다. 신체와 공간에 대한 논의는 페미니즘 주체화의 장소를 정동체로서의 신체로, 차이 나는 여성들의 소통과 연대의 공간을 지리 신체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각기 다른 신체의 차이는 공간적 차이의 맥락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연결의 역량이 된다. 하지만 연결은 물리적 이동과 새로운 공간으로의 이주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노동의 이동을 가속화하고 오늘날의 정치는 수용소와 난민을 양산한다. 이로 인해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 이동하며, 집을 잃고 연결을 놓친다. 페미니즘이 제안하는 연결은 정동체로서의 신체들의 결합이다. 그것은 신체가 기술매개적 매체로 작동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에 대한 최근의 예시는 바로 동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페미니즘 운동이다. 이 운동의 주요한 요인은 인터넷 환경과 디지털 모바일의 기술 변화다. 특히 본격화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소셜 미디어는 페미니즘의 현장의 정치에 새로운 장소가 되고 있다. 소셜 미디어는 개인화된 매체지만 사회적 연결망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연결망은 일종의 지리 신체적 공간으로서 온라인 페미니즘을 창출해내며 “온라인 기술에 힘입은 정동적 순간(Affective Moment)을 생산하고 체험”하게 한다. 이뿐 아니라 “정동이 특히 디지털 혁명에 따른 정보 전달의 속도와 결합”되면서 변화의 순간을 순식간에 전달하고, “페미니즘의 범위를 전 지구적으로 확장”시킨다. 각기 다른 현장이자 장소인 신체가 지리 신체로서의 공간을 창출해냄으로써 페미니즘은 차이를 연결의 동력으로 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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