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살아 숨쉬던 삶과 이름들을 기억하며


   지난달 서울신문이 ‘아무도 쓰지 않은 부고’라는 제목으로 야간노동자 42명의 부고 기사를 1면 전체에 걸쳐 기사화했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스물두 살의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산화한 지 반백 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동자의 인권은 보장되지 않는 현실을 보여준다. 서울신문의 보도는 노동자의 죽음을 숫자로만 보여주던 세상을 향해 그 이름을 나열함으로써 각자가 살아온 삶의 무게를 드러낸다. 뉴스에 등장하는 죽음의 수치들은 그저 안타까운 탄식과 함께 넘길 수 있는 종이 한 장에 불과하지만, 이름으로 함축된 개개인의 인생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쉬이 넘길 수 있는 소식이 아니다.


   한편 슬랩(Slap)이라는 유튜브 채널엔 ‘90년대생 여자들이 사라지고 있다’라는 제목으로 20대 여성의 자살률에 대한 콘텐츠가 올라왔다. 코로나 이후 20대 여성 자살자 수는 2백 96명을 기록했는데, 이는 지난해 상반기보다 43% 증가한 것이다. 언론에서는 유례없이 높은 자살률이라며 앞다퉈 보도했으나, ‘유례없다’는 말로 죽음을 수치화하기엔 부족했다. 취업 부담에 대한 고민을 주고받던 친구와의 대화로부터 더이상 돌아올 답이 없을 때 느끼는 공백은 숫자로 이해되고 메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구의 존재가 사라진 장례식장에서 20대 여성이 느끼는 공허함의 무게는 통계로 설명될 수 없다.

   우린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장례식장을 마주하게 될까. 아마 무수히 많은 부고를 접하고 장례식장에 찾아가는 일이 일상으로 자리 잡을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심코 뉴스 속 기사 정도로 사건을 이해하고 더 이상 그의 죽음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때, 구조적 문제는 몸집을 부풀려 사회적 소수자들을 집어삼킨다. 배달음식을 터치 주문으로 손쉽게 시켜 먹으면서도 자영업자들의 수수료 문제에 예민하지 못했거나, 인터넷 쇼핑을 하면서도 택배 노동자의 죽음은 멀게 느끼는 것도 문제의 원인 중 하나다. 이제 여성들도 차별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며 여성폭력 사건들을 단순한 기삿거리로 넘겨버린 순간도 문제를 키우는 데 손을 거든다. 안전이 담보되지 않은 환경에서 실험을 이어나가던 대학원생들의 피로를 ‘이겨내야 할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안일한 생각도 한몫을 한다.


   맞닿은 삶의 지면만큼, 죽음은 무겁다. 내가 알던 그는 이제 차가운 첫눈을 어루만질 수 없고, 따뜻한 차를 즐길 수 없을 뿐 아니라 새카만 밤에 잠든 뒤 환한 아침을 맞이할 일도 없다는 뜻이니까. 쌓아 올린 시간 위에서 이름을 가진 존재의 죽음은 단순한 1명의 죽음으로 치환되지 않는다. 하나하나에 늘 가슴 아플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1이라는 숫자에 무뎌지지 않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 그가 살아 숨쉬던 삶과 그의 이름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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