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20.11.11 수 11:46
기획사회
[사회] 우리에게 ‘정상가족’은 필요 없다홍혜은 / 비혼지향 생활공동체 공덕동하우스 대표
홍의미 편집위원  |  dmlal33@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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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호]
승인 2020.11.05  19: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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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O결혼이지만 괜찮아 ③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인류의 종족 보존이고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감정이 사랑이라고 일컫던 시대가 있다. 그러나 2020년을 맞이한 오늘날은 더 이상 생존을 위해 결혼할 필요도, 소속과 존중을 얻기 위해 결혼을 ‘해야만’ 할 필요가 없다. 과연 결혼제도는 어떤 역동을 거쳤기에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번 기획에서는 변화하는 결혼의 형태를 살펴보고 결혼 제도의 전망을 내다본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사회적 합의의 시작 ② 결혼식? 난 비혼식 ③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면 ④ 퀴어 생활공동체를 위한 법적 보장

 

우리에게 ‘정상가족’은 필요 없다

 

홍혜은 / 비혼지향 생활공동체 공덕동하우스 대표

 

   그저 숫자로만 나열될 뿐인 데이터 안에는 실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개인은 각자의 자리에서 데이터에 담긴 구체적인 서사들을 떠올린다. 양적 데이터에서는 개인의 서사를 풍부하게 보여줄 순 없지만, ‘나’에서 ‘우리’의 이야기로 풀어나갈 가능성을 열어준다. 나만 그런 줄 알았던 비밀을, 또 부당한 대우의 경험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나도 그랬어’라는 응답은 중요하다. 소수자에 대한 폭력을 묵인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힘이 없지만, ‘그게 뭔 줄 나도 안다’는 감각으로 연결된 사람들에게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구조에 떠밀려 비슷한 처지에 있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더 많이 모일 필요가 있다. 혼자서는 도통 몰랐던 ‘그것’에 우리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이 발생하도록 짜여 있는 구조를 바꿀 수 있다.

 

사회가 정해준 관계의 틀 안에서 우리는

 

   최근 여성, 특히 20대의 자살 및 자해가 증가한다는 통계가 자주 보도된다. 중앙자살예방센터 통계를 살펴보면,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여성 자살 사망자는 전년도 대비 7.1%가 늘어난 천 9백여 명으로 잠정 추산됐다. 정의당 이은주 의원이 제출받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를 참고하면 올 상반기 고의적 자해로 진료를 받은 케이스가 전년 대비 35.9% 증가한 1,076건이라고 하는데, 그중 20대는 213건, 30대는 161건으로 전년 대비 각각 80.5%, 87.2% 증가했다. 또한 지난 9월 22일 YTN의 서울시 자살예방센터 주지영 부센터장의 인터뷰에 따르면, 현장에서도 상반기 20대 여성의 자살 위기 상담 건수가 증가한 것을 체감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선 크게 세 가지 원인이 있는데, 첫째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고민, 둘째로는 관계에 대한 상실감, 셋째는 주거 및 일자리 불안 등의 경제적 환경 요인이다. 필자는 이 중에서도 관계에 대한 상실감을 호소하는 여성들의 서사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사람은 누구와도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와 서로를 돌보며 살아갈 수 있을까. 각자 답을 고민할 겨를도 없이 이에 대한 정답은 이미 주어져 있다. 바로 가족이다. 가족이란 자연발생적이며 ‘원초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날 때부터 선택할 여지 없이 소속되기에 해체나 분리를 상상하기 어렵고, 절대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요구받는 관계망인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사회학자 미셸 바렛(M.Barrett)과 메리 맥킨토시(M.Mcintosh)는 저서 《반사회적 가족(The Anti-Social Family)》(2019)에서 가족이란 그 무엇보다도 사회구성물적인 성격이 강한 존재며 현재 보편적이라고 여겨지는 형태를 띠고 있다고 밝힌다. 또한 이성애 부모와 그 친자녀로 이뤄져 생계를 같이 하고, 그 안에서도 생계부양자 남성과 의존하는 아내의 역할이 나뉜 혈연 집단으로서의 가족은 아주 최근에 형성된 개념이라고 분석한다. 역사학자 장 루이 플랑드랭(J.L.Flandrin)에 따르면, 함께 거주하는 가까운 친척을 가리키는 의미에서의 가족은 18세기 후반까지도 존재하지 않던 개념이라고 한다. 인류학적으로 가족이라 여겨질 만한 친족의 배치는 다양하고 변이된 형태로 존재해 왔다는 것이다.

 

   
 


무릇 가족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생각

 

 

   그렇다면 가족이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그런’ 가족으로 사는 것처럼 여겨져야 한다고 믿는 이들의 믿음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바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다. 필자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으며 이를 강하게 체화한 사람 중 한 사람으로 개인의 경험적 시선에서 그 문제점을 찾아보려 한다. 십 대에서 이십 대 사이의 아름다운 ‘정상가족’을 이루는 데 실패한 부모를 보며 수치스러워했던 경험이 있다. 가부장으로서의 대접은 받고 싶어 하되 생계부양자의 의무를 등한시한 부친. 세상 물정에 어두웠으며 ‘순종적인 아내’ 역할을 하지 못하는 모친. 경제적 취약계층이 되기에 충분한조건을 가졌던 가족. 그런 우리 가족의 주거지가 몹시 열악한 것은 당연했다. 관념 속 정상가족이라면 무릇 부부와 동성인 형제끼리만 같은 방을 쓰고 나머지는 분리된 방을 쓰는 형태로, 주방과 거실이 딸린 햇살이 잘 들어오는 아파트에서 살아야 했다.
   이처럼 원가족의 경험이 엉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정상가족이란 관념 자체의 이상함을 좀처럼 알아채지 못했다. 좀 더 여성으로 잘 살면,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면 좋은 가족을 이루고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이십 대를 보냈다. ‘남들 사는 것’을 상상하고, ‘남들만큼 사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그 결과 필자의 친밀감은 오롯이 개인의 감각을 중심으로 탐구되고 배치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동성 친구와의 관계는 각자의 결혼 후 언젠가 끊어질 것이었다. 이성과 연애를 하면 그 관계가 결혼으로 골인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여러 각도에서 재고 따지느라 쉽게 마음을 열기 어려웠다. 상대와 나의 조건 역시 ‘결혼하기 좋은지 아닌지’를 중심으로 평가하고 판단했다. 원가족의 불행들을 숨길 수도, 제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타인을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하기 어려웠다. 잘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잘 사는 삶’은 점점 더 필자에게서 멀어졌다. 초반 인용된 인터뷰로 돌아간다면 현재 자살 상담 과정에서 드러나는 여성들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원가족에서도 충분한 지지나 정서적 안정감을 얻지 못한, 즉 가족에서의 트라우마 경험 등이 쌓여 있는 상태기에 그들은 사회에서 만든 친구나 애인과의 관계 역시 매우 연약하다고 느껴 인간관계와 관련된 문제를 다루는 데 서툴다. 이 얼굴 없는 이십 대의 모습은 많은 사람이 겪고 있는 문제다. 지금의 눈으로 볼 때, 이 문제의 기저에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

 

 


비혼지향 생활공동체를 경유해 친밀감을 재배치하기

 


   국가 차원에서 보면 결혼으로 이뤄진 ‘정상가족’은 세금을 걷을 수 있고, 경제 인구를 재생산할 수 있는 유용한 형태의 기본단위가 된다. 그렇기에 모든 국민의 삶을 정해진 규격에 끼워 맞추려 한다. 그런데 현재 가족이 이 기능을 충실히 하기 위해선 과거 남성이 가족임금노동을, 여성이 나머지 재생산 노동을 담당하는 형식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남성이 돈을 벌며 동시에 여성은 임신, 출산, 육아와 돈벌이를 해야만 기본적인 기준을 충족할 수있다. 소위 ‘맞벌이’의 보편화이자, 여성의 ‘이중 노동’이다. 국가가 바라는 정상가족 자체가 인간을 완전히 수단화할 때, 그 안에서도 특히 불리한 위치에 놓이는 존재는 여성이다.
   이런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인 상태에서는 누구라도 우울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나’를 중심으로 친밀감을 재배치할 수 있는 자유는 사람들의, 특히 젊은 여성들의 우울과 절망을 해소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기존에 친구, 애인, 가족 등 사회가 칸막이 쳐 놓은 관계들의 한계에 갇히지 않은 채 상대의 무엇이 좋고 싫은지를 개인의 기준에서 좀 더 뚜렷하게 보며 또 이를 요구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 수만 있다면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
   결혼으로 만들어지는 가족만이 친밀감을 실천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통념에 저항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한 끝에 ‘비혼’이란 말을 관계망의 중심에 붙여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삶의 방향이 제도적 결혼으로 흘러가게 될지라도, 그 후 우리의 관계망에서 결혼이 최우선이 아닐 수 있다는 상상력을 열어두고 싶어 ‘비혼지향’이라는 조어를 고안해냈다. 가깝고 느슨한 생활의 영역에서 평등한 질서를 만들고 서로 친밀과 돌봄을 나누는 일이 가능했으면 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비혼지향 생활공동체 공덕동하우스’다. 비혼지향 생활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관계들을 새롭게 경험하고, 다른 방식으로서의 관계 맺기를 만들어나갔다. 이 관계망에서는 나를 포장하지 않아도 문제를 직면하고 대화를 해나갈 용기, 성실함, 평등에 대한 고민과 감각들이 중요했다.
   한편으로 공동체에서의 평등이 어떤 토대 위에서 가능한지도 알게 됐는데 정상가족 중심의 제도적 보장과 혜택을 다른 형태의 가족으로 넓혀갈 뿐만 아니라, 한 개인으로 온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회안전망을 재편하는 일이 필수적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가족, 또는 유사 가족으로 개개인의 친밀과 돌봄, 경제적 부조와 재생산, 행정 관리의 용이성을 모두 충족하라는 강요는 터무니없다. 우리는 이제 가족에게 바라 왔던 것을 하나하나 뜯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에게 더이상 ‘정상가족’은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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