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건식 / 국익연구소 선임연구원

그곳엔 무엇이 있을까 ① 공간에 숨은 정치, 비판지정학

과학실험을 할 때 우리는 진공상태를 전제로 공식을 만들고 계산을 했다. 그러나 현실은 온갖 것들로 가득 찬 곳이자 사물들이 끊임없이 이동하고 변하는 철학적·사회적 공간이다. 이 공간 속에서 개개인은 권력으로 구획된 축들의 교차점 위에서 억압하고 저항하며, 생성·작동·소멸한다. 이번 기획에서는 공간의 정치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실천적 의미를 찾아 적용하며 인간의 신체에 이르는 지리학적 정치의 의미를 에둘러 항해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공간에 숨은 정치, 비판지정학 ② 21세기의 한반도와 탈식민성 ③ 헤게모니, 미국에서 어디로 ④ 지리-신체적 공간의 페미니즘

 

 
 

복합공간으로서 한반도

홍건식 / 국익연구소 선임연구원

   제 20대 해양수산부 장관은 취임식 자리에서 거꾸로된 지도를 내걸었다. 한반도가 거꾸로 뒤집힌 지도는, 한반도에서 출발한 화살표들이 세계 각 지역을 향해 뻗어나가는 방향으로 표시돼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가 해양을 통해 전 세계로 나아감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문재인 대통령이 장관 임명식 당시 ‘해양수산 육성’을 강조했음을 주목해본다면, 정부의 의도가 공간의 시각화를 통해 잘 나타났다.
   한반도는 공간적 차원에서 남북한 갈등, 지역적 차원에서 한국·일본·중국의 갈등 그리고 국제적 차원에서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라는 다차원적이며 다층적인 갈등이 동시에 이뤄지고 있는 공간이다. 한반도와 동아시아 역내에는 국가들의 행동 양식에 대한 규범이나 제도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권은 세계 무역의 약 1/3을 차지한다. 한반도 지역은 혹자가 주장하는 ‘아시아 패러독스’와 같이 경제적 상호의존이 높으면서도 동시에 갈등의 가능성도 큰 역설적인 공간이다. 한반도 공간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기에 역설적 공간으로 남아 있는 것인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지정학, 공간에 대한 정치 연구

 


   지정학이란 공간에 대한 정치적 의미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국제정치학은 국가의 행동 양태 그리고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분석과 예측을 위해 현실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구성주의 등 다양한 연구 방법을 개발하고 발전시켜 왔다. 그중에서 지정학은 시공간에 대한 이해를 통해 국제관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 중 하나다. 국가 간의 관계에 있어서 국가들이 위치한 지리적인 공간적 요소들이 이들의 정치적 또는 전략적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가, 그리고 이들 국가는 공간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활용하는가를 연구하는 영역이다.
   근대적 차원의 지정학은 독일의 프리드리히 라첼(F.Ratzel)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사회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유기체 이론을 만들어 냈으며, 스웨덴의 정치학자이자 국회의원이었던 키옐렌(R.Kjellen)이 ‘지정학’이라는 단어를 만드는 데에도 영향을 줬다. 한편 영미권에서는 마한(A.T.Mahan)의 해양력, 그리고 맥킨더(S.H Mackinder)의 심장 지역 이론 등으로 발전됐다. 고전적 지정학은 학문적 영역으로서 나름의 이론적 체계를 구축하면서도 19~20세기에 제국, 전쟁 그리고 동맹과 같이 국가들의 정치 행동을 정당화하는 사상적 기반으로 사용됐다. 당시 연구자들은 대체로 유력 정치인 또는 국가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로서, 현재를 기준으로 보면 그들이 특정한 외교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정학을 이용한 측면도 배제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라첼과 키옐렌의 연구는 하우스 호퍼(K.Houshofer)로 이어지며 독일 지정학의 학문적 창시자로서 역할을 했지만, 이는 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이 슬라브 지역으로 팽창하기 위한 사상적 기반으로, 2차 세계 대전에서는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침략 전쟁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사용됐다.
   영미권의 맥킨더 그리고 스피크만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러시아 팽창에 대한 봉쇄전략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미국의 지정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마한은 미국의 호혜적 상업적 이익 추구와 해양력 강화라는 미국 대전략의 근간을 제공했다. 이들의 지정학적 사상논리는 케넌(G.Kennan)의 봉쇄전략, 키신저(H.Kissinger)의 세력균형 그리고 브레진스키(Z.Brzezinski)의 《거대한 체스판》(2000) 등으로 계승됐다. 1990년 이후 지정학 연구자들은 기존의 연구가 가지는 한계점을 지적하고 포스트모던적 해석을 제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들은 기존의 연구들이 특정한 가치 그리고 국가 또는 개인의 이해관계를 전제로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분류하고, 국가의 발전을 지리적 요인으로 단순화해 설명함으로써 강대국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됐다고 판단했다.
   특히 제라드 토알(G.O.Tuathail), 사이먼 달비(S.Dalby) 등은 이들 고전지정학이 가지는 관찰자와 관찰 대상의 이분법성 그리고 주체의 객관성을 거부하며 ‘비판지정학’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들에게 지리 지식을 생성하고 확산하는 지식의 생산자는 결국 자신이 처해 있는 세계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지리적 중립성을 가질 수 없으며, 이들의 기술은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현상을 기술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의 외교 정책은 ‘봉쇄’라는 용어로 대표된다. 이는 지정학자가 아닌 일반인이 봉쇄를 상상했을 때에도 지리적 위치와 전략적 특성을 시각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더불어 여기엔 패권 국가의 의도가 반영돼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비판지정학은 패권 국가들의 지정학적 담론화에 담긴 의도를 파악하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비딱한 상상력이 필요할 때

 


   다시 이 글의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한반도라는 공간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남한의 한반도 문제화와 북한의 국제화, 지역적 차원에서 한·중·일의 한반도 서사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 그리고 국제적 차원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중국의 ‘일대일로’가 대립·공존하며 상호 작용하는 공간이다. 더 나아가 4차 산업의 발달에 따라 현실과 사이버가 함께 작동하는 복합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지정학은 19세기 그리고 20세기 초에는 유럽과 미국의 지정학적 특성이 반영된 학문 영역으로 발전했으며 미소 냉전기에는 이들의 세계 전략에도 포함됐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지정학이야말로 강대국의 권력을 공간화·정당화 그리고 합리화하는 승자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으로 우리가 이들의 지정학을 활용한다면 특정 공간에 대하여 강대국이 가지는 정치적 이익을 가늠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한반도가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그래서 갈등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고 배웠다. 때문에 한반도를 떠올리면 경쟁, 분쟁 더 나아가 전쟁과 같은 불안정한 공간이 상상된다. 한반도가 강대국의 체스판 위에 놓여 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와 4차 산업으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 질서의 전환이 이뤄지고 있는 지금, 우리가 한반도에 새로운 공간적 의미를 부여해보는 것은 어떨까. 비판지정학자들의 주장처럼 우리가 주체적으로 한반도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입히고 이를 국제적으로 담론화 한다면 분쟁과 갈등의 한반도가 아닌 평화와 번영의 공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한반도 지도를 비딱하게 바라볼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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