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 / 다빈치교양대학 교수

 음악해석과 비평의 길라잡이


박영선 / 다빈치교양대학 교수


  예술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대상으로 삼는 장르는 주로 시문학과 조형예술이다. 미학에서 소위 이즘(-ism)이라는 양식적 구분도 실은 조형예술에 기반해 확정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만큼 음악은 예술이라 불리는 넓은 스펙트럼의 중심에 있지만 이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단편적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비대상적인 음악의 특성에 있을 것이다. 칸트는 음악을 개념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내용이 결여된 것으로 보며 다른 예술보다 낮은 위치에 배열했고, 헤겔은 오히려 무(無)대상적 추상성 때문에 전적으로 음악을 심정 그 자체의 울림으로 정의하며 ‘절대적 내면성’에 음악의 원리가 있다고 봤다.
  실증주의적 분석에서는 과학적인 방식으로 작업을 수행하는 영미권의 음악학자들이 주를 이루는데 그들은 음악 형식과 구조에 관한 연구에서 음계와 코드의 형성을 위한 음들의 시간적 배분, 12음계 혹은 음렬 작업에 몰두할 정도로 고도의 전문적 언어를 사용한다. 그들의 언어로는 생동적이며 창조적인 음악가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삶과 체험으로 이뤄진 작곡가들의 작품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식이 요구됐고 그 당시 등장한 대안이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로 대표되는 낭만주의 음악해석학이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해석학적 철학’을 전개하는 그들의 사유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작곡가 멘델스존과 개인적 친분을 유지할 정도로 음악과 밀접했으며 그는 음악이 개별사건이 아닌 ‘삶 자체’를 노래한다고 봤다. 이렇듯 음악해석학이 형성되는 과정은 단순히 이론만이 아니라 음악과의 ‘실천적 연관’과 ‘삶의 연관’에서 나온 성과물이다.
  국내외를 불문하고 낭만주의 해석학에 대한 연구 중 음악을 주제로 한 시도는 극히 드물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장유라 논문의 의의는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 저작에서의 산발적인 음악적 논의를 ‘음악해석학’이라는 주제로 재구성한 것에 있다. 이들 두 사상가의 사유세계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지만, 이들이 가진 체계 속에서 음악연구가 이뤄지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낭만주의 해석학을 대표하는 두 철학자의 사유세계와 저작에서 음악이해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규명하고, 특히 해석학적 사유가 어떻게 음악과 예술 영역으로 적용되고 확장되는지를 탐구한 것에 그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음악사적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음악해석학은 구조분석과 의미부여 사이의 균형을 강조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딜타이의 음악작품에 대한 해석은 대체로 음악의 구조적인 분석을 배제한 채, 음악의 내용이 주는 정서적 작용과 분위기를 묘사하는 데 치중한다. 한편 당대에 지배적인 해석이론인 소위 감정이론(Affektenlehre) 역시 음악이 주는 정서적 효과를 음악의 표현이자 내용이라 여긴다. 이러한 맥락에서 딜타이의 낭만적 음악 ‘해석학’이 감정이론과 비교해 볼 때, 어떤 점에서 ‘해석학’ 고유의 관점을 발휘하며 음악을 해석하는지가 명확하지 않아 보인다. 일반적으로 음악은 삶의 체험표현이라고 간주되는데 해석학만이 그런 주장을 펴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장유라 논문이 낭만적 음악해석학의 고유성을 보다 정당화하기 위해선 해석학만이 내놓을 수 있는 논거가 준비돼야 한다.
  낭만주의 음악해석학의 면모를 드러내기 위해서 논문이 포함하고 있지 않은 범위의 질문도 유의미할 수 있다. 해석학 내부적인 질문이다. 딜타이 낭만주의 음악해석학의 요체는 텍스트에 담긴 작곡가의 개인적 정서와 정신을 추체험하는 데 있다. 반면 딜타이 이후의 철학적 해석학자인 가다머(H.Gadamer)에 의하면 작품은 수용자와의 만남을 통해 존재가치가 확인된다고 한다. 텍스트는 더 이상 작곡가에 속한 것이 아니라 수용자 자신의 해석적 언어라는 것이다. 음악으로서의 텍스트는 이른바 ‘지평융합’에 의해 새롭게 이해되고 연주되며 재조명된다. 이렇게 가다머의 입장에서 딜타이에게 질문을 던진다면, 음악의 추체험을 통해 텍스트의 객관적 이해를 되살리는 것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는 마치 바흐를 객관적으로 되살리기 위해 당시에 사용된 악기로 연주해야 한다는 입장과 다름없어 보인다. 딜타이의 음악해석학은 낭만주의 시대에 속한 하나의 해석 지류가 아닐까 하는 질문이 생기는 것이다. 장유라 논문은 이런 의문에 대한 후속 과제를 내포하고 있다.
  음악애호가의 입장에서도 음악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에 대한 관심이 높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인문적 성찰은 우선 양적으로도 기대만큼 많지 않다. 이는 음악의 고유한 기호와 체계가 음악문법으로 훈련되지 않은 인문학도에게 해독하기 힘든 일종의 상형문자와 같기 때문이며, 반대로 인문학 특히 철학이 지닌 나름의 학문체계 역시 음악에 생소하기 때문일 것이다. 음악에 대한 효과적인 인문적 성찰을 위해선 두 학문 영역에 대한 통섭적 지식과 이해가 기본이 돼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장유라 논문이 이를 향한 초석이 되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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