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혜송 / 국민대 강사

불온한 ‘아름다움’ ③ 지워진 여성의 ‘흔적’

우리는 보통 예술에 대해 논할 때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을 함께 쓰곤 한다. 그만큼 예술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작업이자 대상 그 자체로 인식되며 이때 아름다움이란 외적인 균형과 조화를 충족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나 오늘날은 전통적 미의 해체와 전복이 이뤄지면서 미적 개념 적용의 폭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따라서 ‘아름다움’이 가지는 유동적 정체성에 대해 조명하고 사회구조 및 문화와 결탁해 생성된 미학적 가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시대를 횡단한 ‘아름다움’  ② 그로테스크의 미학 ③ 지워진 여성의 ‘흔적’ ④ 일탈과 자유의 경계에 선 타투
 

전복의 자화상

임혜송 / 국민대 강사
 
 《현대적 삶의 화가(Le Peintre de la vie moderne)》(1863) 속 보들레르(C.Baudelaire)가 지적했던 ‘인공적’이고 아름다운 여성의 이미지는 20세기 이전까지 서양미술 전반에 걸쳐 관습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남성중심주의 시각으로 관찰되고 대상화된 여성의 신체는 이후 초현실주의 미술에서 복합적인 젠더 정체성의 연출로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여성 작가의 자화상 사진에서 사회적 타자로서 느끼는 심리적 불안감과 정체성의 혼란은 자아 은폐와 가장의 방식으로 표현된다. 내면의 욕망과 환상을 가시화하는 그녀들의 자화상에서 여성의 몸은 젠더 경계가 모호한, 해체되고 모순된 형상으로 나타난다. 클로드 카엔(C.Cahun)의 전복적 자화상은 초현실주의 여성 작가들이 보여준 관습화된 남성적 문맥의 수사적 비틀기 그 이상의 다층적 문맥으로 결합해 있다. 주체의 잠재된 욕망과 무의식의 단면을 투사하는 여성의 자아 이미지가 이성애적 가치 규범의 전복과 허구적 페르소나의 가장으로 재현되는 것이다.
《부인된 고백 (Aveux non avenus)》(1930) 3장
《부인된 고백 (Aveux non avenus)》(1930) 3장
 
클로드 카엔의 발자취

  1894년 프랑스 유대계 부르주아 지식인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난 카엔은 유년 시절부터 낭트의 유력언론사 사주인 아버지와 상징주의 시인인 삼촌의 소개로 당대의 많은 문학계, 연극계 저명인사와 직접적으로 교류한다. 특히 삼촌과 절친했던 오스카 와일드(O.Wilde)의 동성애 미학과 10대부터 문학 잡지에 칼럼을 기고하던 그의 경험은 후일 카엔이 창작하는 레즈비언 미학 서사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또한 부친과 재혼한 마르셀 무어(M.Moore)는 예술적 동지이자 평생의 동반자로서 카엔의 다양한 저술과 사진 작업에 함께한다. 1920년 연인인 무어와 파리로 이주한 후에는 비교연극(Theatres Esoterique), 르 플라토(Le Plateau)연극단의 무대 활동에 참여한다. 그 당시 다양한 문화계 인사와의 교류는 본격적인 아방가르드 모더니즘으로의 미학적 진화로 이어지는 발판이 됐다.
  1932년 앙드레 브르통(A.Breton)과의 만남을 계기로 가입한 혁명적 작가·예술가 연합에서 카엔은 문학적 시각 비평을 담당했다. 또한 정신과 의사 가스통 페르니에(G.Ferdiere)의 임상강의에서 정신병 환자와의 접촉으로 얻은 정신분석학적 지식은 카엔의 초현실주의 책 《부인된 고백(Aveux non avenus)》(1930)과 1936년 국제 초현실주의 오브제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38년 이후 나치에 의한 유대인 탄압 때문에 카엔은 영국령 저지섬으로 피신했고, 그는 무어와 함께 반 프로파간다 활동을 지속한다. 1944년 퇴폐예술과 레지스탕스 운동 혐의로 체포 구금된 그는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지만 종전 직전에 수용소를 탈출하기도 한다. 이 시기의 사진 작업은 반파시스트 저항을 통한 사회변혁과 인간 정신의 해방을 추구하는 초현실주의 이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920년대부터 1945년까지 작품 전체에서 카엔은 레즈비언 엘리트로서 여성성 은유와 나르시시즘, 젠더 가장의 자화상을 사피즘(Sapphism)과 상징주의, 초현실주의의 미학적 수사를 통해 재현해낸다.
 
《부인된 고백 (Aveux non avenus)》(1930) 3장
《부인된 고백 (Aveux non avenus)》(1930) 3장

억압되고 허구적인 젠더

  카엔의 전복의 자화상 이면에는 레즈비언 엘리트의 주체적 자아 발견과 성 정체성의 재정의라는 사포의 ‘여성주의적’ 동성애 미학이 숨겨져 있다. 특히 1920년대 신여성의 젠더 모방은 카엔의 생애 전반에서 연출되는데 자아 비판적 패러디와 동성애의 은폐를 위해 왜곡된 신체의 가장 및 정체성 전복은 대표적 사례다. 이때 카엔은 본명인 뤼시 르네 마틸드 슈보(Lucie Renee Mathilde Schwob)를 지우고, 중성적인 이름인 ‘클로드’와 모계 쪽 성 ‘카엔’으로 개명한다. 이는 부계 혈통을 부정함과 동시에 당시 레즈비언 예술가 사이에서 유행하던 젠더 경계를 약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카엔의 자화상 사진 일부는 아버지의 가부장적 권위를 모방하거나 남성적인 제스처를 가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남성 젠더 모방에는 단순히 남성적 특권과 권위의 심리적 공유 그 이상으로 젠더 전형화의 허구성을 조롱하는 아방가르드적 연출전략이 숨겨져 있다. 부친의 측면 프로필 자화상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모방한 자화상에서는 삭발한 두상과 악마와 같이 뾰족한 귀를 통해 ‘의도적 추함’을 강조하고, 유대 인종에 대한 문화적 적대감을 매부리코라는 시각적 기표로 부각시킨다.
  역사적으로 남성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비교적 관대했으나 레즈비언의 성적 욕망은 퇴폐적인 일탈 행위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19세기 가부장적 담론이 팽배한 상징주의 예술은 레즈비언 육체를 위험한 상상의 동물 혹은 세기말적이고 뇌쇄적인 팜므파탈의 이미지로 그린다. 심지어 독일 정신과 의사이자 극작가였던 오스카 파니차(O.Panizza)는 유대 여성 살로메를 기독교도인 남성에게 매독을 퍼트린 존재로 왜곡시켜 묘사함으로써 서구 기독교 전통에 뿌리 깊게 남아있던 인종적 편견을 증명한다. 비천한 존재, 남성의 제어가 필요한 저급한 동물의 형상은 카엔의 《부인된 고백》에서 자신을 추락 천사, 뱀의 이미지로 등장시키는 방법으로도 나타난다. 또한 그는 자아 정체성의 ‘상징적 거세’에 대한 불안감을 자신의 흉부 엑스레이 사진, 리비도의 상징인 도요새 부리의 포토몽타주로 표현하기도 한다. 결국 성적으로 억압받는 여성 신체와 자아 정체성에 대한 카엔의 개인적 트라우마가 왜곡되고 해체된 이미지로서 우의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판토마임 배우과 같이 분장한 카엔의 〈나는 훈련 중이야 내게 키스하지 마시오(Don’t Kiss Me. I am in Training)〉(1927) 속 코믹한 캐릭터는 과장된 여성미를 강조하는 인위적 화장과 제스처, 그리고 장난감 역기로 신체를 단련하는 모습을 통해 여성 젠더의 인공성을 조롱한다. 이 지점에서 카엔은 19세기 보들레르의 《화장 예찬(Eloge du maquillage)》(1863)이 지적하는 “본성을 감추거나 정체성의 추측을 피하려는 화장”을 르 플라토 연극의 ‘인간의 축소’라는 아방가르드적 가장(Masquerade)의 미학으로 승화시킨다. 더 나아가 그는 1928년의 자화상을 통해 젠더 억압을 상징하는 여자 마네킹으로 분장하거나 르 플라토의 연극 〈파란 수염(Barbe Bleu)〉의 부인 ‘엘르’ 역할로 분장하며 성적 거부감을 암시하는 얼어붙은 육체, 즉 ‘섹슈얼리티의 소멸’을 연기한다. 《인간의 경계(Frontieres humaines)》(1928)표지를 위해 제작된 다중인화 자화상과 여성스러운 어깨선을 드러내고 외계인처럼 삭발의 두상을 길게 늘여 인화한 자화상은 현실의 왜곡과 비이성적 조합으로 이뤄진 주체의 양성적 욕망을 은유한다. 초현실주의의 ‘꿈의 이미지’로 해석될 수 있는 실험적 이미지나 허구의 여성성으로 양성적 페르소나를 연출하는 자화상은 진정한 자아를 현실로부터 도피시키고 보호하는 일종의 “상상계의 방패”로 해석될 수 있다.
 
모방과 폭로의 미학

  카엔은 자화상 사진과 문학작품 속에서 특정한 의상이나 제스처가 의미하는 기표적 단서를 복합적으로 병치시킴으로써 성 정체성에 대한 경계를 지워버린다. 특정 문화에서 젠더가 지니는 기표적 특성을 모방하는 드래그 퍼포먼스를 통해 젠더의 비고정성을 드러내고 젠더 정의의 허구성을 패러디하기도 한다. 1차 대전 이후 예술계에서 부각된 양성적 젠더의 미학적 표현은 카엔의 전복의 자화상에서 ‘정신의 혁명과 관습의 전복을 꿈꾸는 초현실주의’ 미학의 방식으로 재현된 것이다. 왜곡과 허구의 가장으로 자아를 재현하는 인공의 자화상은 유대인으로서의 인종적 결함과 레즈비언 자아의 정체성 혼란을 암시한다. 포스트 식민주의자 호미 바바(H.Bhabha)는 정체성에 관한 질문에 대해 “모방(Mimicry)은 마스크 이면에서 정체성이나 존재의 그 어떤 것도 은폐할 수 없으며, 모방의 행위는 문화적 규범을 노출시킬 수도, 붕괴시킬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양성적 인물로 가장하는 카엔의 모방행위 이면에 감춰진 정체성의 폭로와 자기 파괴의 이중성은 작품 전반의 특징이다. 결국 남근 중심주의와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정신의 해방을 추구했던 예술가이자 여성 지식인이었던 카엔은 신체의 정치학을 통해 아방가르드 미학의 잠재력을 선구적으로 실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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