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차라리 마녀가 되겠다

   2015년 소라넷,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2017년 문단계 내 성폭력, 2018년 미투운동, 2019년 다크웹, 2020년 텔레그램 N번방까지 수많은 사건들을 거쳐왔지만 안전하게 살고 싶다던 여성들의 목소리는 견고한 착취구조에 부딪혀 이 사회에 균열조차 내지 못했다. 이 구조는 범죄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국가와 성 착취물을 보면서 낄낄거리거나 방관했던 주변인 등 수많은 행위자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철창이었다. 이런 문제적 구조가 일상이 된 여성들은 새벽에 컵라면 사러 나가는 것조차 두렵다. 귀갓길엔 등 뒤를 한 번 더 살피고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올 땐 후다닥 문을 닫고 들어가 시간이 꽤 흐른 뒤에야 방에 불을 켠다. 여성들이 안전한 사회는 도대체 언제쯤이면 만날 수 있는 걸까.
   이 위험한 사회는 여성을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는 사회문화에 기인한다. 모든 인간에게 이성이 있다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1781)이 나오고 자유와 평등, 박애를 외치던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지 2백여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여성은 ‘인간’이 되지 못했다. 인간(Man)을 상정하기 위해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여성들은 타자화됐다. 이 과정에서 주체성은 삭제됐고 허구의 남성성만이 허공을 맴돌았다. 허구적 남성성은 실재하는 여성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 ‘객관적이며 중립적’이라고 여겨지는 과학의 영역에서도 이들의 존재를 지워냈다.
   이처럼 인간이 아닌 ‘여/성’의 목소리는 동등한 외침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분노에 찬 이들이 거리로 나온다 해도 목소리는 희미하게 전달됐고 죽음의 행렬은 멎지 않았다. 마침 총선을 앞두고 있으니 이 행렬이 언제쯤 멈출지 정치권의 변화를 통해 살펴보자. 20대 국회는 남성 국회의원 비율이 83%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남성의원의 수가 많았다. 개중엔 텔레그램 N번방을 ‘그 나이대 남자애들은 호기심으로 다 본다’고 외치던 이도 있었다. 여성의 결이 다양한 만큼 여성 집단이 하나의 동질성을 담보할 수 없지만 이토록 적은 인원으로는 남성 중심적인 문화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조차 어렵다. 그렇다면 21대 총선에서는 변화가 생겼을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21대 총선 후보자의 평균나이는 55세이고 여성 비율은 19.1%라고 한다. 더군다나 지역구 후보는 총 943명인데 이 중 여성 공약을 내걸고 각종 매체에 노출된 후보는 40여 명에 불과했다. 일상의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정치’의 틀에서조차 여성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여성 의제가 대변될 수 있는가.
   여성의 인권은 ‘충분히’ 올라오지 않았다. 여성들은 여전히 매일매일을 ‘살아남는’ 사회에 산다. 여성이 안전하게만 살게 해달라. 안전한 사회를 향해 부르짖는 최소한의 외침마저도 ‘마녀’들이 내는 소리라고 한다면 오늘 밤에도 후다닥 문을 닫고 들어오는 대신 차라리 외치고 부르짖는 마녀가 되겠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