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진 / 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불온한 ‘아름다움’ ② 그로테스크의 미학

우리는 보통 예술에 대해 논할 때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을 함께 쓰곤 한다. 그만큼 예술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작업이자 대상 그 자체로 인식되며 이때 아름다움이란 외적인 균형과 조화를 충족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나 오늘날은 전통적 미의 해체와 전복이 이뤄지면서 미적 개념 적용의 폭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따라서 ‘아름다움’이 가지는 유동적 정체성에 대해 조명하고 사회구조 및 문화와 결탁해 생성된 미학적 가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시대를 횡단한 ‘아름다움’  ② 그로테스크의 미학 ③ 지워진 여성의 ‘흔적’ ④ 일탈과 자유의 경계에 선 타투

추와 역겨움의 미적 향연


김홍진 / 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보들레르(C.Baudelaire)의 《악의 꽃(Les Fleurs du mal)》(1857) 연작시 〈환영, 1.어둠〉은 “침울한 여주인 ‘밤’과 홀로 사는/나는, 아! 조롱하는 ‘신’의 강요로/어둠의 화폭 위에 그림 그리는 화가,/거기서 나는 음산한 식욕 가진 요리사,/내가 내 심장을 끓여먹”으며 “어둡고 동시에 빛을 발하는 여인”을 환시한다. 시인은 음산한 식욕을 가진 요리사로 제 심장을 끓여 먹는 괴물이다. 이처럼 현대의 예술가는 신적 창조성을 부여받은 축복보다는 조롱하는 신의 강요로 어둠의 화폭 위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현대예술은 마치 보들레르가 “어둡고 동시에 빛을 발하는 여인” 앞에 선 것처럼 ‘어둠’의 세계로 들어서면서 진정한 ‘빛’의 세계를 꿈꿀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인 셈이다.
  ‘어둠’은 근대의 메커니즘에 의해 끊임없이 배제와 억압, 부정과 은폐를 통해 어둡고 축축한 저편으로 유폐됐다. 문명화는 야만, 비이성, 비정상을 생산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 정형과 기형, 대칭과 비대칭, 조화와 부조화, 질서와 혼돈, 숭고와 천박, 우아와 비속, 삶과 죽음, 정신과 육체, 미와 추, 선과 악 사이의 위계에서 그로테스크(Grotesque) 미학은 후자의 주변에서 증식을 거듭한다. 그것들은 이성과 문명의 빛 뒤편에서 추악한 것들을 불러내 전자의 빗금 너머에 존재하는 본성으로서 혐오스럽고 역겨운 것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미적 한계가 아닌 가능성으로

  보통 기괴, 엽기 등의 용어들로 번역되는 그로테스크는 대체로 흉측하고 두려운 것 등의 어사들을 제 서술어로 거느린다. 또한 비례와 균형으로부터 어긋나 우스꽝스럽고 양립할 수 없는 이질적 요소들이 혼성적으로 뒤섞인 악마적인 것 등으로 설명되며 안정된 질서와 규범을 파괴할 수 있는 불경·불온한 성격을 갖는다.
  이는 바흐친(M.Bakhtin)이 말하듯 격하시키는 것, 즉 고상하고 정신적이며 이상적인 모든 것을 물질과 육체적 차원으로 이행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로테스크가 포함하는 주요한 미학적 형질은 예술이 흔히 이상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행위 및 표현이라 믿는 고전적 문화 보수주의자에게는 쉽게 용납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로테스크는 고전적 관념이나 합리성과 대립하는 다양한 환상과 변형, 혼종과 왜곡에 기초한 이미지들을 생산한다. 그런 까닭에 일종의 미학적 한계 현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로테스크 미학을 상징 질서로 수용할 수 없는, 윤리적·미적 탈선으로만 간주할 순 없다. 이는 기존의 개념이나 지식의 범주 밖에 존재하는 것이 출현할 때, 괴물이나 비정상적인 것으로 호명해 추방하려는 인식론적 태도와 직결된다는 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로테스크는 지각의 한 양식이자 세계를 상상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이 된다. 사실 추하고 엽기적인 것들은 우리가 몸 들어 사는 세계와 인간성의 근원에 흔하게 널브러져 있다. 인간과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임에도 우리는 그것을 인식 범주나 지각 체계 밖으로 배제했다. 데리다(J.Derrida)가 말했듯 종 아닌 종, 형상 없는 형상, 말 없고 어리고 끔찍한 괴물의 형상으로 무언가 출현하면 말이다. 이 괴물들은 이름도 형상도 없고, 지식의 범주로도 포획되지 않는 미지의 존재, 캄캄한 인식의 어둠이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공포를 야기한다. 정상을 헤치는 몹쓸 것인 셈이다.
  하지만 오늘날 주관주의적 미의 원리가 부상함에 따라 그로테스크의 괴물성은 새롭게 주목받아 전통적 미의 부정과 해체를 통해 전경화되고 있다. 여기에는 절대적인 이원론적 세계관과 이성의 독재에서 벗어나 상대적 다원성을 중시하는 시대정신이나 분위기가 함께 한다. 아울러 개인의 미적 취향이 다양화되는 문화 현실에서 그것은 더 이상 추방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안에는 이성이 외면하고 은폐한, 이를테면 정상이라는 기준 너머에 숨겨진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카이저(W.Kayser)에 의하면 그로테스크는 소외된 세계다. 이성이 고의로 억압한 그곳에 삶과 세계의 진면목이 있을지도 모르며 그 안에 창조적 상상력을 발동하는 새로운 잠재태(潛在態)가 원석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로테스크 미학의 여러 얼굴

  그로테스크한 형상이나 표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메두사나 폴리페모스를 창조한 그리스 로마 신화나 음란한 성적 농담과 지저분한 변증법적 유머로 가득 찬 중세 수도사 라블레(F.Rabelais)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Gargantua et Pantagruel)》(1532-1564), 시종일관 듣기 민망한 욕설과 육담을 늘어놓는 김삿갓의 시편 등 풍부한 문학적 적층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또한 동물 사체를 포르말린 용액에 담가놓은 데미언 허스트(D.Hirst)의 수족관, 신디 셔먼(C.Sherman)의 사진, 매튜 바니(M.Barney)의 설치미술 등 역겨운 예술(Abject Art)을 통해 그 진경을 맛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연주와 황병승, 김언희와 김민정의 시, 김동인과 최명익과 손창섭을 거쳐 백민석, 편혜영 등의 소설은 모두 악마적이고 위악적인 도발로 가득하다. 이들 작품에선 신체의 절단과 훼손, 살 속의 구더기 떼와 점액질의 미끈거리는 촉감, 코를 찌르는 시취와 시즙, 다종다양한 분비물 등 혐오스럽고 엽기적이며 추악한 이미지의 향연이 펼쳐진다.
  가령 “그 남자의 몸속에는 그 여자의 시신(屍身)이 매장되어 있었다 서로의 알몸을 더듬을 때마다 살가죽 아래 분주한 벌레들의 움직임을 손끝으로 느꼈다 그 여자의 숨결에서 그는 시취(屍臭)를 맡았다 그 남자의 정액에서 그녀는 그녀의 시즙(屍汁)의 맛을 보았다”는 김언희의 〈그라베〉(2000)에서의 위악적인 언어, 전율이 이는 수사, 익살스러운 이미지를 보자. 미의식과 형상들은 장르를 불문하고 그로테스크한 작품들에서 다양하게 구현된다. 독성(瀆聖)의 언어는 해괴망측한 형상들이 혼종적으로 재현된 중세 히에로니무스 보스(H.Bosch)의 〈최후의 심판(The Last Judgement)〉(1504-1508), 종교 도덕적 권위에 내재하는 위선을 조롱한 펠리샹 롭스(F.Rops)의 그림, 활짝 핀 벚꽃나무 밑 땅속 시체를 환시한 가지이 모토지로(K.Motojiro)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반역의 또 다른 이름

  범람하는 역겨움, 충격적이며 잔혹한 이미지들의 나열에는 지옥과 파멸에 대한 공포보다는 오히려 도발과 반역, 위반과 전복의 욕망이 도사려 있다. 금기의 언어는 악마의 조롱을 머금고 작품의 행간과 문맥을 누비며 모욕을 일삼는다. 위악적 미의식은 내부의 야만을 출현시키며 현실원칙을 악의적으로 파괴한다. 카니발의 스캐톨로지(Scatology)가 그러했듯 각종 신체 분비물을 흘리면서 구역질 나는 위선적 현실을 대놓고 모독한다.
  그로테스크 미학을 전경화하는 예술작품들에서 예술을 예술답게 한다고 여겨지는 미의식은 위선적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는 일종의 정치적 저항으로 지배적 미적 규범과 가치, 윤리와 도덕, 권력과 권위에 오물을 끼얹으며 모욕을 주고 폐기처분을 선언하는 행위다. 상징 질서의 매끄럽고 안정된 현실의 이면을 투시하는 그로테스크는 새로운 미적 영지에 대한 강렬한 욕망과 기대가 서려 있는 것이다.
  그로테스크는 왜곡된 현실을 강요받는 인간과 삶의 모순을 탄핵하기 위한 미학적 전략이다. 그것은 기성의 지배적인 미적 문법을 향한 안티테제로서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부정과 위반의 정신을 대변한다. 그로테스크의 어원인 ‘Grotto’가 지하동굴, 무덤이라는 뜻과 함께 발굴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처럼, 그로테스크 미학은 기존의 미적 인식을 전복해 새로운 가치와 이념을 발굴하기 위한 미학적 고투로 볼 수 있다.
  다시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래는 기존에 구성된 정상 상태로부터, 절대적으로 단절되는 무엇으로부터 일종의 괴물성으로 선포될 수 있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이성의 저편에 존재해 괴물로 여기고 배척했던 것들에 미지의 진리가 깃들어 있음을 환기한다. 결국 이성의 빛을 존재하게 한 어둠과 습기 찬 영역에 우글거리는 그로테스크 미학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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