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정 / 대구 가톨릭대 프란치스코 칼리지 조교수

불온한 ‘아름다움’ ① 시대를 횡단한 ‘아름다움’

우리는 보통 예술에 대해 논할 때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을 함께 쓰곤 한다. 그만큼 예술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작업이자 대상 그 자체로 인식되며 이때 아름다움이란 외적인 균형과 조화를 충족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나 오늘날은 전통적 미의 해체와 전복이 이뤄지면서 미적 개념 적용의 폭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따라서 ‘아름다움’이 가지는 유동적 정체성에 대해 조명하고 사회구조 및 문화와 결탁해 생성된 미학적 가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시대를 횡단한 ‘아름다움’  ② 그로테스크의 미학 ③ 지워진 여성의 ‘흔적’ ④ 일탈과 자유의 경계에 선 타투
 

미의식의 역사와 미적 체험

박유정 / 대구 가톨릭대 프란치스코 칼리지 조교수
 
 
  미(美)는 너무나 신비롭다. 이보다 더 우리의 마음을 앗아가는 신비가 있을까. 과연 아름다움이란 무엇이길래 이토록 신비로운가. 미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우선 서구 미의식의 역사를 보자. 서구의 미학은 미의식이 ‘객관적 미’에서 ‘주관적 미’로, 즉 미의 본질을 객관적 실체에서 찾는 ‘객관주의 미학’에서 그것을 주관의 판단에서 찾는 ‘주관주의 미학’으로 이행돼 왔다고 보고한다. 전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서구 미학의 유구한 전통을 형성했고, 후자는 18세기 영국의 경험주의 미학에서 시작돼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비로소 등장한 미의식이다. 이는 이후 현대 예술의 해체주의에까지 이어지는 미의식의 뿌리가 됐다.
  서구의 미적 전통은 아름다움을 객관적 미의 형상의 문제로서 바라본다.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모방론(미메시스 Mimesis)’으로서 정식화돼 아름다움이란 곧 외부 존재를 그대로 복사하거나 ‘객관적 미’의 원리를 재현하는 데서 성립한다고 본다. 이러한 재현예술 혹은 모방론은 서구의 미의식을 2천5백년 동안 지배했는데, 이를 미적 객관주의 혹은 객관주의 미학이라고 부른다. 이때 모방하거나 재현하는 객관적 미는 미적 형상으로서의 실재다. 이는 피타고라스학파에서 조화, 질서, 비례로 제시한 수적 원리에 따른 것으로 플라톤은 이를 기하학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미메시스, 즉 모방이란 단순히 외부 존재를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기하학적 원리로서의 실재인 미적 형상을 복제 혹은 재현하는 것이 된다.
  객관주의 미학의 서구적 전통은 조화와 균형으로 자연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고대 그리스나 르네상스 조각에서 혹은 사실주의 회화 속 대상을 사진 찍듯이 복사해내는 화풍에서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들은 황금분할이나 피보나치수열 혹은 조화수열과 같은 수적 원리로 환원될 수 있는 객관적 미의 원리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예술가는 이러한 객관적 미를 알아차려 불완전한 세계에 완전한 이데아의 형상을 수놓는 듯 창작해낸다고 믿었던 것이다.
 
‘객관적 미’에서 ‘주관적 미’로

  객관주의 미학의 전통은 19세기 낭만주의에 이르러 패러다임 전환을 이룬다. 즉 아름다움은 아폴론적인 객관적 미의 모방에서만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적인 내적 세계에서도 주관적인 미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강렬한 붓 터치나 개성적인 색채 혹은 예술가의 내적 정서도 그것이 미적 진실성을 갖는다면 아름다움으로서 수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관주의 미학은 영국의 샤프츠베리(T.Shaftesbury)와 허치슨(F.Hutcheson) 등의 경험주의 미학에서 시작돼 바움가르텐(A.Baumgarten)과 칸트(I.Kant)에 의해 취미판단이라는 주관의 형식으로 정식화된다. 이제 미는 조화와 균형의 객관적 미의 원리를 상실했더라도 주관의 내적 형식을 통해 무관심적 쾌를 동반한다면 아름다움으로서 수용될 수 있는 것으로 그 개념이 확장된다.
미켈란젤로(B.Michelangelo)의 《피에타 Pieta》
미켈란젤로(B.Michelangelo)의 《피에타 Pieta》
 각각 서구 미의식의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위의 미켈란젤로(B.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는 옷자락 표현의 사실성, 성모의 품에 안긴 예수의 자세, 그리고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성모의 표정 등에서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읽을 수 있다. 그에 반해 아래의 터너(J.Turner)의 《파도 Snow Storm》는 사실적인 묘사는 없지만, 붓 터치의 느낌을 통해 자연적 사실보다 더 리얼하게 느껴지는 파도의 느낌을 표현하였다.
터너(J.Turner)의 《파도 Snow Storm》
터너(J.Turner)의 《파도 Snow Storm》
 
미의 패러다임 전환 : 미적 체험

  낭만주의 예술의 출현과 주관주의 미학이 끌어낸 객관으로부터 주관으로의 미 개념의 확장은 인간적 자유의 확대만큼이나 예술적 자유의 확대로 이어졌고, 현대 모더니즘 예술의 등장은 전통의 파괴와 기술 문명의 발달을 토대로 극단적 자유로 나아가기에 이른다. 이로써 현대적 지평에서 미란 스스로가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해체돼 가고 있다. 따라서 이제 미란 더는 아름다움의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아름다움의 ‘체험’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적 체험이란 무엇인가.
  체험(Erlebnis)이라는 말은 생철학자 딜타이(W.Dil they)가 정신과학의 인식이론 속에서 ‘삶의 체험’으로서 언급했다. 딜타이에 따르면 체험은 삶 속에서 시간의 흐름이 형성하는 실재성을 담아내는 것이다. 이때 삶의 시간성과 실재성을 담아낸 체험은 반성이나 성찰로서의 내면적 문제가 아니라 삶과 연관이 있는 삶의 범주로, 역사적인 것이다. 이에 반해 후설(E.Husserl)은 체험을 현상학적 시각에서 ‘의식의 체험’으로 생각한다. 후설에 따르면 의식은 체험을 포괄하는 것이고, 의식은 체험의 흐름 속에서 작용한다. 이때 의식의 순수자아는 ‘의식-지금’을 형성하는 체험 지평을 가지고, 그로써 의식은 세 차원의 시간이 통일되는 체험의 흐름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의 체험은 심리학적인 사실이 아니라 무엇에 관한 의식인 지향적 사유작용이다. 즉 후설에게 체험이란 의식의 체험으로서 현상학적으로 경험되는 ‘의식의 지향성’, 간주관적 체험이다.
  한편, 하이데거(M.Heidegger)는 후설의 의식의 지평을 존재의 지평으로 해석해 의식의 지향적 체험이 아니라 의식이 존재론적으로 개시되는 실존범주를 문제 삼는다. 또한 이때의 실존범주는 딜타이 부류의 생철학 및 실존철학에서 유래했지만 그것은 실재성의 체험이 아니라 존재론적 개시성(Erschlossenheit)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체험을 데카르트에 기인하는 내면성의 철학에서 발견되는 논의로서 존재론적 차원에서 해체돼야 할 과제로 보고, 그것은 의식의 지향성과 같은 현상학적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 개시성에서 성립하는 간주관적 체험이라고 본다.
 
존재론적 산물로서의 아름다움

  이런 의미에서 미적 체험은 아름다움의 형태를 문제시하는 객관주의도, 아름다움의 판단을 문제시하는 주관주의도 아니라 그러한 주객 구도에 선행하는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체험이다. 이는 낭만주의 이후 주관주의 미학이 극단화돼 해체주의적으로 가는 현대적 지평에서 현상학적으로 발견된 미론이다. 이에 따라 현대의 다기화(多岐化)돼 가는 예술양상에 대해서 아름다움을 말할 때 그것은 객관적 미도 주관적 미도 아니라 그 사이의 간주관적 체험 속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즉 미적 체험이란 존재론적 관계 속에서 미적 진실을 갖는 존재가 발현할 때 드러나는 신비를 현상학적인 체험 속에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미적 체험을 존재진리가 비은폐되는 밝힘(Lichtung)에서 드러나는 존재의 빛이라고 했다. 아름다움이 미적 체험 속에서 현현(顯現)한다면 그것은 그러한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 즉 간주관적 존재체험이지, 결코 주관과 객관의 어느 하나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런 점에서 미적 체험은 미적 진실로서의 존재진리가 계시돼 열어 밝혀지는 존재의 밝힘이고 그러한 존재의 장소에서 발현되는 빛을 만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서구의 미의식 역사는 미의 본질이 객관적 미에서 주관적 미로 이행돼 왔다고 보고했고, 이는 플라톤주의의 모방론에서 낭만주의 및 칸트의 취미판단론으로 정식화돼 예술의 본질을 규정지어 왔다. 그리고 주관적 미를 필두로 하는 미적 주관주의는 이후 현대적 미의식을 규정해 미의 본질을 극단적 자유의 영역으로까지 해체함으로써 아름다움이란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라는 문제의식을 낳았다. 이에 현대의 해석학은 딜타이에서 후설 그리고 하이데거를 경유하면서 아름다움이란 체험의 산물이지만 간주관적인 체험으로서 존재론적 산물이라는 데까지 그 논의가 심화하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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