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말한다는 것]


‘헛되게’ 시간 보내기

  ‘당신은 쓸데없는 데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오늘도 청년은 꾸지람을 듣는다. 이는 종종 찬란하게 빛나고 생동감 넘치는 ‘젊음’을 담보로 한 방황으로 포장되지만 실상 여기엔 조건이 있다. 청춘으로서의 시간 낭비는 짧을수록 좋고, 그 방황의 형태는 결국 기성의 구조에 몸을 욱여넣을 수 있을 만큼 무르고 유연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콘텐츠 플랫폼이 가장 주목받는 트랜드로 떠오르면서 이를 중심으로 관심사나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거나 직접 콘텐츠를 만드는 사례가 부쩍 늘고 있다. 특히 청년들이 주요 소비층이자 생산층으로 자리 잡은 것에 눈길이 간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유형의 콘텐츠를 소비하는지, 특정 팬덤에 가입해 어떻게 활동을 하는지, 해당 경험을 응용해 어떤 2차 생산물을 만드는지 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한마디로 자투리 시간을 모으고 모아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그 일원이 되면서 기성세대와는 다소 다른 방법으로 하루를 그려가는 것이다.
  우리는 소위 청년문화를 하위문화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주류문화에 대항하는 성격을 가진 단어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청년문화는 결코 주류가 될 수 없는, 언제든 변방의 이름 모를 존재들로 흩어질 수 있는 무언가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청년의 모습을 한 행위들은 종종 독자적인 의미를 생성하는 것은 물론, 향유하는 것조차 비생산적이고 쓸모없는 일로 치부된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숨 쉬고 꾸려나가는 삶이 모두 ‘낭비’라는 이름으로 묶여 부정당할 때, 오늘도 청년은 ‘헛된 청춘’으로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정해져 있는 길로 바쁘게 회귀 중이다.

이희원 편집위원 | ryunis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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