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우 / 《장제우의 세금수업》 저자

낙인으로 쌓아올린 ‘정상’사회 ① 청년과 ‘근면한’ 기성세대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E.Goffman)에 따르면 현대인의 삶은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타인과의 대면적 상호작용을 통해 자아를 연출해가는 한 편의 연극과도 같다. 이는 개인이 결코 온전히 개인으로서 존재하지 못하며 늘 사회적 구조 및 구성원과 결탁해 정체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정체성 구성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인 ‘낙인’은 한 개인에게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편견을 덧입혀 그 존재를 축소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번 기획에서는 주류 사회가 정해놓은 ‘정상’이라는 기준에 미치지 못한 자들이 수많은 ‘죄목’을 달고 타자화되는 현상과 낙인이 어떻게 설득의 힘을 가지며 유지되는지, 그 폭력성에 대해 주목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청년과 ‘근면한’ 기성세대  ② 정신질환자와 ‘안전한’ 사회  ③ 퀴어와 ‘이성애’ 남성  ④ 난민과 ‘대한민국’ 시민
 

‘근면’으로부터의 탈출

장제우 / 《장제우의 세금수업》 저자
 
 
  인류 발전의 역사엔 ‘낙인과의 전쟁’이라는 축이 있다. 인종, 여성, 빈자, 소수자 등 사회적 낙인으로부터 억압받는 이들이 늘 존재했지만, 인류는 모종의 낙인들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전진해왔다. 예컨대 복지제도의 발전은 실직자나 빈자에 대한 낙인을 크게 완화했다. 저 옛날 17세기 영국의 구빈법은 빈민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이들을 억압하는 수단으로서, ‘근면’이라는 도덕적 잣대로 나태함을 퇴치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나태한 자들은 누더기를 걸쳐야 한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어서는 안 된다”라고 외친 당시의 이론가, 존 벨러스(John Bellers)의 도덕관이 대표적이다.
  일하지 않는 자에 대한 낙인은 근현대 복지국가의 성장으로 크게 해소된다. 일례로 ‘황금삼각형 유연안정성’으로 이름 높은 덴마크는 실직자의 소득지원과 재취업을 위한 교육 및 지원에 OECD 최대의 재정을 지출한다. 이직과 실직이 빈번하고 청년실업률도 높은 편이지만 이들의 노동시장과 생활 여건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스웨덴의 인상적인 사례도 있다. 2003년 스웨덴은 연간 병가 사용이 무려 ‘1억일’에 달해 상병 부문의 복지지출이 OECD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 시기의 경제성장이나 실업률이 ‘복지병’으로 인해 부진했다는 분석은 ‘1억일 병가’를 게으름과 활력 없음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그러나 스웨덴 역사상 최저치를 이어오던 출산율이 반등했다는 점은 복지병이라는 기존의 부정적 관념이 교정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근면’이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

  한국 사회는 실직자나 빈민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강고하다. 가까운 예로, 칸영화제와 아카데미를 동시 석권한 봉준호 감독의 역작 〈기생충〉(2019)이 정작 한국 개봉 당시엔 기묘한 논란을 불렀다. 봉 감독이 사회 취약계층을 비하한 것 아니냐는 시비였다. 실제로 적잖은 관객이 네 식구가 모두 백수인 것을 한심해하거나 피자 상자도 제대로 못 접는 주제에 바라는 게 많다고 비웃기도 했다. 여기에는 구빈법 시대에나 어울릴 낙인이 서려 있다.
  “가난한 실업자는 어떤 일이든 가리지 말고 필사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게으르고 나태한 것이다”라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기생충〉의 네 가족이 지질한 백수로 여겨질 법한 모습은 그들의 일생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러나 선입견의 안경을 쓴 이들에겐 이 가족이 지난 시간 열심히 살아왔다는 사실은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적정 일자리가 부족한 한국에서 살다 보면, 자영업 풍파에 휩쓸리면, 대학 간판이 중요한 사회에서 부대끼다 보면, 건강한 네 사람이 동시에 백수일 수 있다는 생각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비판자들의 눈에 비친 것은 ‘가난한데 절박함이 없어 보인다’는 못마땅한 광경이었다.
  한국의 기성세대는 근면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살았다. 근면에 대한 칭송 문화는 지금도 강력하다. 사실 이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한국의 경우 기성세대가 뿌려놓은 근면함의 정도와 형식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지난 ‘장미대선’의 후보자 토론이었다. 당시 홍준표 후보가 이른바 ‘귀족노조’를 몰아세우자 심상정 후보는 거세게 반발했다. 필자는 심 후보의 이 발언이 ‘거슬렸다’. “육체노동자는 잔업 특근하고 일요일도 없이 일하면 도지사보다 더 받으면 안 됩니까?”라는 항변이 우리 사회가 타파해야 할 구시대 노동관의 일면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홍 후보와 심 후보의 공방은 ‘근면 이데올로기’의 퇴행적인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일화였다. 한국에선 상층노동자의 급여가 너무 높다고 급여의 수준을 문제시하는 쪽과 쉬지도 않고 일을 하는 장시간의 노동을 예시로 들며 급여가 많은 게 뭐가 문제냐는 쪽의 시대착오적인 시비만 난무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동자가 하루 8시간, 일주일 40시간 이하로 노동시간을 줄이면서도 ‘평범한’ 생활을 가능케 한 것은 선행국가들의 성과이자 한국도 이미 실현했어야 할 과제다. 우리는 이 같은 사회구조를 성취하기 위한 논의 대신 표피적인 ‘원흉’ 공방에 골몰하며 시간을 허비해 왔다.
 
‘나태해서’ 죄송한 청년

  ‘근면한’ 기성세대가 기틀을 다져놓은 ‘과로사회’에서 청년세대는 다중적인 문제에 부딪힌다. 상대적으로 급여와 근무여건이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살인적인 경쟁을 뚫어야 하고, 이에 탈락한 다수는 장시간 노동에 투항하거나 다양한 기피 일자리를 마지못해 받아들여야 한다. OECD 최대 수준의 청년 실업률의 일부가 되거나 ‘니트(NEET)족’의 일원이 돼야 하기도 한다. 마지막에 속하는 청년들은 〈기생충〉의 백수 가족처럼 손가락질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눈높이를 낮춰라, 예전엔 다들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부모 세대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아느냐”는 눈총들은 실업 청년을 ‘게으른 철부지’인 양 몰아세운다. 우스운 것은 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식은 눈높이를 높여 험한 일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이처럼 한국의 실업 청년들은 상당수 기성세대의 낙인과 위선적인 경쟁의 추구 앞에 ‘성실한 일꾼’으로 길들기를 요구받는다. 하지만 그 일꾼에게는 평범한 생활이 좀처럼 보장되지 않는다.
  청년에 대한 복지정책에서도 기성세대의 낙인찍기는 위력을 발휘한다. 특히 보수 언론 및 정치인들은 청년에 대한 소득지원이 취업과의 직접적인 연관이 적다며 ‘구빈법 시대’의 낙인을 찍으려 힘을 쏟는다. 선행국가들은 취업과의 연관성을 구직 및 교육활동 참여 여부로 판단하지만 일각에서는 지원된 소득이 취업 용도에 쓰이는지 그 여부까지 관여하려 한다. 이들이 보통 국가의 개입을 염려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다른 나라에서는 하지 않는 개입까지 국가가 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어색하게 다가온다. 이 같은 시대착오적 국가 개입 의지는 ‘실업 청년은 나태하다’는 낙인을 찍으면서 동시에 복지 확대가 탐탁지 않은 내심까지 충족하려는 일타쌍피의 전략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기성세대 다수가 청년에게 미안하다고 한다. 정파와 성향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청년들을 괴롭히는 언행들을 끊임없이 늘어놓는다. 기성세대의 이 교묘하고 다층적인 압력으로부터 한국의 청년세대는 빠져나올 수 있을까. 세금과 복지를 활용해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적정한 노동 여건의 일자리를 최대화하는 국가군의 존재는 이와 정반대의 상황에 있는 한국 사회에 유용한 시사점을 준다. 세대를 뛰어넘는 해법이 청년을 위한 해법도 될 수 있으리란 질문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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