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우 / 한국예술종합학교

하이바이! 노동! ① 플랫폼 자본주의


   21세기 이후 우리의 삶에서 플랫폼 노동이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됐을 때 자본주의는 어떤 방식으로 플랫폼 노동과 결합하는가. 변동하는 자본의 세계를 읽고 기본소득과 플랫폼노동조합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패러다임을 상상해야 한다. 플랫폼과 정보들의 범람 속에서, 이번 기획은 기존에 개별화된 노동자들이 ‘우리’라는 연대를 통해 새로운 대안을 찾을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이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플랫폼 자본주의 ② 새로운 ‘일’의 세계 ③ 기본소득과 플랫폼 노동 ④ 연대, 그리고 노동조합

 
 

 

세계는 어떻게 신 중세로 진입했는가

신현우 /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했으며 오로지 자신의 노동을 팔아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아홉 시에 출근해 열 시에 퇴근하는 노예의 삶이고, 다른 하나는 건물주에게 월세를 바쳐가며 월매출과 권리금에 전전긍긍하는 들개의 삶이다. 임금노동이건 자영 노동이건 월세에 쪼들릴 수밖에 없는 생존 현실이 펼쳐져 있고, 하늘 위로 날아오른 적도 없는데 모두가 추락하는 중이다. 최고의 시대이자 최악의 시대인 신자유주의 끝자락의 오늘날, 두 노동의 궤도에서 굴절된 새로운 삶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인터넷 스트리머, 배달 라이더, 우버 운전사 등은 전조에 지나지 않는다.
   생존을 위협하던 ‘월세’는 주거, 에너지, 통신을 넘어 일상과 삶-활동을 아우르는 자본의 기본적인 토대로 전화(轉化)했다. 영상 및 음원 스트리밍과 같은 콘텐츠 플랫폼은 집 안팎에서 수없이 재생되고 있다. 공유를 빙자한 다양한 온-디맨드(On-Demand) 플랫폼들은 급속도로 지분을 늘리는 중이다. 해당 플랫폼들은 나눔과 유휴자원의 활용 등을 핑계 삼아 시장에 진출, 기존의 자영업 또는 자투리 노동의 대부분을 단시간 내에 접수해버렸다. 이 외에도 온갖 종류의 ‘공유’를 주제로 하는 플랫폼들이 도처에 등장하고 있다. 도대체 플랫폼이 아닌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오늘날 플랫폼을 투과하지 않는 상품과 노동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이버네틱스가 가져온 지대이윤의 시대

   ‘삶과 노동의 플랫폼화’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축적 매커니즘과도 직접적으로 결부된다. 많은 긱(Gig) 노동자들이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생활양식은 아마 근미래에 대부분 없어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기술이 발전하고 생산성이 증대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돼 궁극적으로는 유토피아가 실현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물질계에 존재하는 모든 에너지는 유용한 형태로 변환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그리고 그 형태변환은 오로지 인간 노동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 자동화가 아무리 진전돼도, 사이보그와 로봇이 거리를 뒤덮어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애당초 로봇(Robot)은 이미 어원부터 노동자였으며, 그간 무수히 쓰였던 디스토피아 소설의 고고학은 노동에 대한 선험적인 알레고리였다. 그리스 민주정 시대에는 노예가 있었고, 농업 혁명 이후에는 농노가 있었으며, 산업혁명 이후에는 임노동자가 있었다. 그렇다면 사이버네틱스·인공지능 혁신 뒤에는 무엇이 올까. 인지 노동자, 자유 무임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등 새로운 형태의 착취와 수탈이 이뤄질지도 모른다.

   ‘사이버 프롤레타리아’라는 범주 안에서 계급은 재구성되고 있다. 다니엘 벨(D.Bell)이나 피터 드러커(P.Drucker) 등이 내다본 것처럼 50-90년대 탈산업사회가 연착륙하고 지식경제가 본질이 됐지만, 복잡하게 분화됐던 ‘계층’은 결국 프롤레타리아의 경계 안으로 수렴되는 중이다. 한쪽에서는 고도의 사이버네틱스화가, 다른 한쪽에서는 ‘이윤의 지대 되기’가 은밀히 진행되고 있다.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스마트 공장 등 다양한 신기술들이 마치 새로운 혁명을 이뤄낼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프롤레타리아의 삶은 산업혁명기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과거의 자본이 임노동을 양적·질적으로 착취했다면, 오늘날의 플랫폼 자본은 자영업(긱 노동·프리랜스 노동·영세사업 노동)을 빙자로 해서 지대이윤을 착복하고 있다. 바야흐로 자본은 한계에 도달했고, 세계는 중세 봉건 영주들이 공물을 가져가던 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임계점에 도달한 노동

   오늘날 자동화 국면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지구적으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비율이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는 역설이다. 가치는 오로지 노동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데, 자동화는 노동을 끊임없이 추방한다. 추방당한 노동은 구매력이 없다는 이유로 가치 실현을 하지 못한다. 그동안 언제나 특정 산업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늘어나면 반드시 다른 산업 부문에서 새로운 노동력의 포섭이 있었기 때문에 일자리는 어떻게든 벌충됐고 임금 노동을 매개로 하는 자본주의적 착취 구조는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플랫폼 자본주의의 현실에서 이런 낙관주의는 불투명하다. 임노동을 투입해서 상품을 만들고 그것을 판매해 가치 실현을 해야 하는데 이 프로세스는 이제 더 이상 예전만큼의 효율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커즈와일(R.Kurzweil)이 말했던 ‘특이점’이란 단지 기술적 특이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에 도달한 자본주의적 축적의 특이점, 즉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임계점을 의미한다. 이 특이점의 성좌에서 더 이상의 새로운 직업이라는 벌충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내면, 친밀감, 분노, 증오와 같은 것들로 최근의 사이버네틱스와 정보기술은 이런 것들 역시 이미 사회적 필요노동 시간으로 식민화하기 시작했다. 어셈블리라인에서 시간당 얼마씩 만들어지는 자동차나 가전제품처럼 고유하고 내밀한 인간 감정과 언어, 표현과 수사 등이 추상의 수준에서 생산된다. 최근의 소셜리딩과 살롱 플랫폼은 얼마든지 그것을 사회적 필요 노동시간으로 계산할 수 있음을, 인간의 느낌과 내부감각의 화학 작용을 상품으로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것들은 심지어 ‘상실’이 아닌 ‘생성’의 프로세스로 가치화한다.


새로운 중세에서, 우리의 과제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1978)에서 난장이가 삼 남매를 위해 공구 자루를 질질 끌고 길을 나섰던 것처럼 플랫폼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자들은 내일 없는 자영업의 현장, 개인사업을 빙자한 수탈의 토지로 나아가야만 한다. ‘프롤레타리아’라는 프레임 안에서 우리는 행복동 난장이의 가족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사이버-프롤레타리아’라는 틀이 겹쳐지면 예속적인 기술 디바이스들이 훨씬 더 삶·정치적인 성격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갈등을 둘러싼 자본주의 구조적 모순이 ‘이윤의 지대 되기’를 가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로소 난장이 가족으로부터 차별화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4차 산업 혁명이나 인공지능을 산업 부문에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 지에 대한 상투적인 고민이 아니라, 기술·미래적 성찰과 인간/반인간에 대한 재고찰이다. 기계의 언어로 쓰이고 강철의 역학으로 올려 세워진 바벨의 탑이 어느 고도 위에서 햇빛과 구름의 움직임을 가로막고 있는지 정확하게 측정해야 한다. ‘인간성 파괴를 목도하는 것’이 아닌, ‘인간성 파괴의 구조적 힘을 제대로 응시하는 것’이 새로운 중세인 플랫폼 자본주의 현실에서 가장 시급하게 풀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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