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조 / 성소수자 대학원생/신진연구자 네트워크 기획팀장

[특집 기고문] 경계를 항해하는 연구의 공간


만들어진 ‘평화’를 위해 지워지고 주변화되는 주체들의 목소리는 학계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견고하게 쌓아올려진 학문의 틀 안에서 연구자들은 끊임없이 창의성을 요구받지만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는 위협받기도 한다. 이처럼 비규범적 성과 퀴어학에 대한 학술지가 부재한 상황에서 ‘성소수자 대학원생 / 신진 연구자 네트워크’는 학문의 경계를 항해(Navigating)하며 그 발걸음을 이어가고 있다. 새롭게 발돋움하는 연구단체를 기대하며 ‘정상성’이 무력화된 어느 하루를 꿈꿔본다. <편집자 주>

 

'비정상적인' 성, 혹은 지식의 정치

정성조 / 성소수자 대학원생/신진연구자 네트워크 기획팀장


   매년 여름, 서울시청 앞 광장에는 무지개 깃발과 십자가를 손에 쥔 두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50명 남짓으로 시작한 서울퀴어문화축제는 20년이 지난 지금 수만여 명의 인파가 성소수자의 인권과 자긍심을 노래하는 대규모 행사로 성장했다. 광장의 맞은편에는 “동성애는 죄악”이라고 외치는 이들도 함께한다. 이들은 성소수자의 인권을 부정하면서 ‘정상적인’ 성을 수호해야 한다고 외친다.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금지하고, 성교육과 인권조례에서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관한 항목을 삭제하고, 성소수자를 ‘비정상적인’ 존재로 낙인찍으면서 사회적으로 배제하려는 것이다. 성을 둘러싼 투쟁은 이미 한국 사회의 한복판에 들어서 있다.

 
 

   ‘정상적인’ 성이란 무엇인가. 이성애 가족과 출산에 관련되지 않는 성이 부자연스럽고 부적절하다는 견해는 종교적인 교리뿐만 아니라 마치 과학적으로 들리는 논변으로 치장된다. 혐오를 정당화하고 확산하는 데 앞장서는 이들은 의사나 교수와 같은 ‘전문가’로서의 권위를 곧잘 동원한다. 요컨대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를 정상적인 존재로 보는 관점은 잘못된 과학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혐오가 지식으로 둔갑하는 현상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동성애 등 ‘비정상적인’ 성행위를 처벌했던 서구 기독교 사회에서 근대적 법체계의 합리화 과정은 필연적으로 동성애 혐오를 정당화할 과학적인 근거를 요구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볼 때 우생학에 가까운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성과학(Sexology)은 당대만 해도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여지면서 동성애를 병리화 하는 데 공헌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혐오 세력에 복무하는 지식인들은 ‘비정상적인’ 성 정체성을 판별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고 있다.

 

‘정상적인’ 성이라는 신화에 대한 도전

   오늘날 한국 학계가 이처럼 시대착오적인 혐오 선동에 직접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학계는 여전히 성에 관해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무지하다고 보는 편이 차라리 옳을 것이다. 여러 페미니스트 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에 관한 체계적 지식이 학계에서 상식으로 자리를 잡지는 못했다. ‘정상적인 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이성애자 남성의 이익과 가부장제의 유지에 복무하는지 분석하고 적극적으로 비판한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 더구나 성소수자의 삶과 경험은 최근에서야 연구 주제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성소수자의 삶이나 비규범적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연구 주제로 삼은 학위논문은 열 편 남짓에 불과했으나, 2010년대에 들어선 뒤로는 수십여 편의 논문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한국에서 성소수자 연구는 이제 막 본격적인 발돋움을 한 참이다.
   한국의 성소수자 연구는 성소수자 인권운동과 함께 성장했다. 무엇이 성소수자 차별이고, 그 차별의 원인과 해결책이 무엇인지 등 성소수자가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려는 바람은 인권운동의 형태를 통해 직접적으로 표출돼왔다. 그리고 인권운동의 자장 속에서 성장한 연구자들은 그러한 욕구를 더 정교하게 표현하고 분석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미국 성 정치와 섹슈얼리티 연구의 역사를 살펴봐도 이러한 경향은 유사하게 나타난다. 미국에서도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동성애 해방운동과 급진 성 정치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비로소 비규범적인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학술적 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성소수자의 삶과 경험이 연구 주제로 주목받는다고 해서 성소수자 연구가 저절로 확고한 학문으로 성장하지는 않는다. 섹슈얼리티는 서구 학계에서 이제 계급이나 젠더, 인종과 같이 사회를 분석하는 기본적인 렌즈로 이해되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에서는 학술적으로 진지한 주제가 아니라고 치부되기도 한다. 비규범적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연구 주제로 삼으면 부적절하거나 불필요한 주제라는, 아주 나은 경우에도 평판이나 경력을 위해서는 보다 ‘안전한’ 주제를 선택하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이러한 연구가 때로는 중요한 연구라고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아직 변방에서 벗어나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향은 성소수자 연구가 또 다른 사회적 소수자를 연구대상으로 추가하는 것일 뿐, 학술적 지식체계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미미한 변화에 불과하다는 입장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성소수자 연구는 더 거대한 변화, 이를테면 인식론적 전환을 수반한다. 90년대 이후 성장한 퀴어이론(Queer Theory)은 페미니즘이 그러했던 것처럼 섹스와 젠더, 섹슈얼리티, 그리고 몸과 욕망에 관한 지식 전체에 도발적인 질문을 제기하면서 인간을 이해하고 분류해 온 질서에 도전한다. ‘비정상적인’ 동성애가 아니라 이성애란 도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정상적인’ 성으로 자리매김해 왔는지 질문하고, 재생산을 기준으로 삼는 ‘정상적인’ 몸과 생애주기, 그리고 사회적 제도에 의문을 제기한다. 즉, 퀴어이론은 성소수자 연구를 사회 전반에 대한 비판적 이해로 확장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퀴어 이론가 이브 세즈윅(E.Sedgwick)은 “근대 서구 문화의 양상을 이해하고자 할 때 동성애/이성애라는 근대적 규정을 비판적으로 해석하지 못하는 분석의 중심적 토대는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그만큼 훼손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소수자 연구자 커뮤니티의 성장

   ‘성소수자 인권포럼’의 사전 행사 격인 ‘성소수자 연구세션’은 새로운 앎의 체계로서 성소수자 연구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토론에 목말라 있는 대학원생과 신진연구자에게 마련된 대안적 공간 가운데 하나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이 2008년 이래로 매년 개최하는 성소수자 인권포럼에서 성소수자 연구를 별도의 세션으로 구성하기 시작한 것은 2016년부터다. 해당 연구 세션에는 법학이나 사회학, 인류학, 보건학, 철학, 문학 등 다양한 학제의 연구가 제출된다. 즉, 성소수자 연구는 실제로 특정 학문 분과에 국한되기보다는 섹스와 젠더, 섹슈얼리티, 몸, 그리고 욕망에 관한 인식론적 도전을 공유하는 데 의존한다. 연구 세션은 서로 다른 학문체계에서 ‘비정상적인’ 성이 어떻게 정의되고 있는지 함께 논의하고, 운동과 학문의 언어가 교류하는 장으로서 간학제적이고 역동적인 성소수자 연구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모임을 가지고 있는 '성소수자 대학원생/신진연구자 네트워크'
모임을 가지고 있는 '성소수자 대학원생/신진연구자 네트워크'

   특히 여타 학술대회와 이 연구 세션이 다른 점은 그 주축이 주로 대학원생과 신진연구자라는 데 있다. 앞서 살펴본 문제의식과 연구 세션의 경험을 바탕으로 최근 ‘성소수자 대학원생/신진연구자 네트워크(이하 성연넷)’이 출범하기도 했다. 성연넷은 다양한 학제에서 성소수자 연구를 하는 이들의 모임으로,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구성원은 대부분 현재 석/박사 과정 중에 있거나 최근에 학위를 취득한 신진연구자다.
성연넷은 월례 세미나와 방법론 워크샵 등의 활동을 통해 각자의 고민을 나누고 교류하는 커뮤니티를 만들고자 한다. 출범한 지 4개월 만에 70여 명이 가입하는 등 연구자 커뮤니티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이들의 열기로 가득하다. 앞으로 성소수자 연구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연구를 이어갈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고 이를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성에 관한 해방적 지식을 향하여

   ‘정상적인’ 성이 존재한다는 신화는 서울광장 맞은편에서 “동성애는 죄악”이라고 외치는 이들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성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거나 이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고, 성이 사회적 위계를 구조화하는 방식을 때로 간과하는 지식체계를 변화시켜야 하는 커다란 과제가 남아있다.
성소수자 연구의 궁극적인 효용은 인간을 이해하는 앎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재구성해 ‘정상적인’ 성의 신화를 무력화하는 데 있다. 성소수자 연구와 퀴어 이론이 이미 제도화된 서구와 비할 바는 아니며, 성소수자 연구나 비규범적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관한 논의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술지 하나 없는 것이 한국의 엄연한 현실이다. 물론 이 같은 시차를 단순한 뒤처짐이 아니라 지식 생산의 지정학과 서구 제국주의의 역사적 유산이라는 틀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성연넷의 활동과 성소수자 연구자 커뮤니티의 성장은 그 현실을 바꿔 나가려는 출발점인 셈이다. 그리하여, 게일 루빈의 말처럼 “장차 언젠가는 성이 정말로 주변적인 것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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