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20.1.2 목 12:52
기획문화
[문화1] 광장, 사회를 담아내는 그릇이 되다박승규 /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장소정 편집위원  |  sojeong2468@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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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호]
승인 2019.12.03  23: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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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땅 위에서 탈일상의 춤을 추다 ④ 광장과 카니발 정치

종교적 의식에서 유래해 현대에 이르러 정교한 상업화 과정을 거치기까지, 축제는 고유의 폭발성과 오락성으로 민중들의 유희를 담보하면서도 지배세력을 풍자하고 권력관계를 전복하는 정치적인 기능을 잃지 않았다. 역사와 기원부터 역동적인 변모를 겪은 오늘날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축제를 접근해봄으로써 축제의 내포적 의미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박승규, 〈카니발과 미학적 정치 공간〉, 《공간과 사회》 제34권’을 바탕으로 쓰였음을 밝혀둠.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축제의 역사와 현대적 의미 ② 퀴어, 다양성, 축제 ③ 책장 위의 카니발 ④ 광장과 카니발 정치

 

   
 

광장, 사회를 담아내는 그릇이 되다


박승규 /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다시 광장이다. 이제 우리에게 광장은 정치의 공간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공간이다. 그곳을 누가 전유하는가에 따라 광장은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 공간으로 변화한다. 한편 광장은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이식된 공간이다. 효율과 합리를 지향하는 광장은 역전이나 관공서 앞에 만들어졌다. 관의 활동을 홍보하는 계몽의 공간이었고, 관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들의 집회 공간이었다. 박정희 정권도 여의도에 5·16 광장을 만들었다. 이명박 정권에서는 서울 광장을 만들었고, 그를 이어 서울시장을 지낸 사람은 광화문 광장을 만들었다. 이처럼 광장은 비움으로써 자신의 욕망과 기억을 드러내는 공간이었다.

도시를 채우는 광장의 목소리들

  이탈로 칼비노(I.Calvino)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1972) 속 도시처럼 광장은 사물 자체가 존재하는 공간은 아니다. 그가 그려낸 도시를 채우고 있는 것은 기억과 욕망이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기억이나 욕망이 도시의 의미를 만든다. 광장은 보이는 도시지만, 그곳에 보이는 것은 ‘텅 빔’ 뿐이다. 텅 빈 광장을 채우는 것 역시 기억, 욕망, 신념 등이다. 하지만 권력은 기억이나 욕망조차 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권력은 광장에서 자신들의 과거를 기억하고 기념하고 싶어 한다.
반면 다중(Multitude)은 권력과 생각이 다르다. 이들은 광장에서 촛불을 든다. 권력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일상의 불편함에 관해 말한다. 권력이 비움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듯,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그곳에 모여 촛불을 들고 자신을 확인한다. 촛불 대신 태극기를 들어 자신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처럼 광장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 하나의 목소리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여러 개의 목소리가 공명하는 세계임을 보여준다. 마치 하나의 카니발이 열리는 것처럼 광장은 다양한 목소리들로 채워진다. 촛불로 밤을 밝히면서 그들의 카니발은 흥을 더해간다.
  서양에서 카니발은 일상에서의 일탈이나 예외를 미리 인정한 행사였다. 사회의 가치나 통념을 전복시키고, 사회질서나 특권계급을 비웃는 자리였다. 그렇기에 카니발은 견고하게 만들어진 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작은 틈이다.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 미래를 도모할 수 있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마치 우리가 지난 정부의 부조리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부를 맞이하게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

  바흐친(M.Bakhtin)에게도 카니발은 전복을 꿈꾸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며, 현실적인 부조리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다. 마치 저잣거리에서 양반의 부조리함을 조롱하던 탈춤의 미학을 연상하게 한다. 탈춤은 구조화된 질서와 전통적인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고, 전복을 꿈꾸는 사람들의 웃음이었다. 카니발은 우리 사회에서 공명하는 작은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미리 인정된 예외의 시간이다. 그렇기에 카니발이 열리는 광장은 새로운 사회나 다른 삶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실존의 장인 셈이다.
  권력은 광장의 ‘텅 빔’을 선호한다. 광장의 텅 빔은 도시에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새로운 병리적 공간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사회적 관계가 소거된 광장의 텅 빔을 마주하면서 사람들은 아고라포비아(광장공포증, Agoraphobia)를 느낀다. 인간의 경험 세계를 제거하고, 예외적인 경험을 할 수 없게 만든 텅 빈 공간으로서 광장은 아고라포비아의 대상이 된다. 권력은 어쩌면 도시의 한가운데를 비워놓음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단절시킴으로써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는지 모른다. 이를 위해 권력은 지속적으로 광장을 비우길 원한다. 광장의 비움을 유지하기 위해 광장을 공원화하는 것조차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광장에 모인 다중은 그들만의 카니발을 통해 권력에 순응하길 거부한다. 광장에서의 새로운 관계를 통해 새로운 광장의 크로노토프(Chronotope)를 만든다. 다중은 권력이 비우려는 광장을 채우고, 서로를 마주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경험의 세계를 만든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의 배경에 대해 묻지 않는다. ‘나’를 드러내기보다는 ‘우리’를 말한다. 나에게 침잠함으로써 찾아가는 내가 아니라, 나와 마주하고 있는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를 찾아간다. 마주하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나를, 우리를 만들어간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Ranciere)가 말하는 정치적 주체의 모습을 광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정치의 미학이 구현되는 공간

  랑시에르에게 주체는 철저하게 정치적이다. 그에게 정치는 공동체의 삶을 지도하는 기술이자 민주적인 다수의 법을 공동체적 삶의 원리로 전환하는 기술이다. 평등이라는 전제를 현실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권력을 중심으로 사회를 경영하는 통치와는 다르다. 랑시에르는 기존의 정치를 ‘치안(Police)’이라 말한다. 진태원은 권력이 만들어 놓은 기존의 합의체제, 기존의 분배에 대한 정당화 체계가 이뤄지는 과정 모두가 치안이라 밝힌 바 있다. 치안은 ‘감각들의 짜임’의 문제이고, 이런 치안에서 벗어난 정치는 바로 ‘감각적인 것들의 나눔’을 지향한다.
  랑시에르가 주장하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구성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말과 소리 등이다. 이것을 통해 정치는 기존의 감각적 짜임에서 벗어나, 공동체적인 삶의 원리를 새롭게 규정하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재구성한다. 새로운 주체와 대상을 공동체 안으로 끌어들여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들고,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게 한다. 소음만 들리던 곳에서 담론이 들리고, 소음으로 들었던 것을 담론으로 알아듣게 만든다. 이런 요소들이 랑시에르가 주장하는 정치의 미학을 구성한다.
랑시에르의 관점에서 본다면, 광장은 정치의 미학이 구현되는 공간이다. 랑시에르에게 정치가 갖는 미학적 특징은 누구나 정치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정해져 있는 틀을 갖고 사람들의 생각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 정치인 것이다. 누구나 광장의 주인이 되고, 누구나 광장에서 객체가 된다. 광장의 정치학은 개인의 이익을 강제하지 않는다. 그 공간에서는 개인의 이익보다, 공공의 선이 우선한다. 개인의 특징과 상관없이 공공의 선을 위해 대화한다. 광장은 그렇게 정치의 공간으로 거듭난다.

모두의 광장, 우리의 세상

  고대 아테네에서 아고라에 모여 민주주의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제한적이었다. 여성, 노예, 외국인은 배제됐다. 하지만 오늘날 광장은 그렇지 않다. 정치적 이념이나 사회적 배경에 상관없이 ‘누구나’ 가능하다. 모두의 공간이고, 모두를 위한 장소다. 자기 생각을 펼칠 수 있으며 자신의 생각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다. 특히 대한민국에서 광장은 거리응원과 촛불로 상징되는 공간에서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동사적(動詞的) 공간이다. 이로써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민주주의의 실험장이 됐다.
  광장은 비어있는 만큼 그 사회가 지향하는 모습을 온전하게 담아내는 그릇이다. 우리에게 광장은 가축성을 거부하고, 야생성을 드러내라 말한다. 다양한 정치적 주체들이 모여 우리에게 익숙한 정치가 치안임을 말하고, 이전과는 다른 정치적 실천을 행하라 말한다. 광장이라는 공간은 우리이며, 우리는 광장에 투사된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정치의 장이 광장이다. 동시에 오늘날 광장은 성찰의 대상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성성(Polyphony)이 공명하는 공간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는 고민이다. 이런 광장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세상을 꿈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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