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현 / 계명대 여성학과 교수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여성정치 ④ 정체성 정치, 그 이상으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한국사회의 절대적인 문법으로 자리 잡았다. 개인적·정치적 이해관계로 분화되는 신자유주의적 삶의 조건에 따라, 정체성 정치 역시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에 본 지면에서는 여성정치의 새로운 언어라 할 수 있는 ‘실천이론’과 그 정치적 구현인 ‘아고니즘 정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여성정치가 여성 간의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차이를 뛰어넘는 연대’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여성, 정치를 다시 읽다 ② 한국정치의 여성주의 테제 ③ 정치적 존재로서의 여성 ④ 정체성 정치, 그 이상으로

 

 
 

 

실천이론의 정치적 구현, 아고니즘 정치

조주현 / 계명대 여성학과 교수


  근대적 개혁이 피억압집단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분명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저항을 통해 개혁을 이뤄낸 것이었다면, 정체성 정치를 통한 형식적 제도개혁 전략에만 의존할 수 없는 후기 근대의 개혁은 사회변화의 기제에 대한 이해가 먼저 전제돼야 가능한 것이다.
  필자는 ‘실천이론’이 이러한 사회변화의 기제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해왔다. 실천이론은 인간이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보일 수 있는 것은 사회구성원들의 공동 창작물인 다양한 사회적 실천들을 통해서라고 설명한다. 인간의 능력을 구현시켜주는 사회적 실천들에는 언어, 법, 윤리, 시장과 같이 사회의 핵심적인 제도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이슈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적 실천들도 포함된다. 예컨대 성평등 관련구성원들에 의해 유지·변화되는 사회적 실천이나 청년 여성활동가들의 정치전략과 관련된 다양한 당사자들이 유지·변화시키는 사회적 실천, 나아가 일시적인 유행도 사회적 실천을 형성하는 구심점이 될 수 있다.


사회적 실천의 안정성과 변화가능성

  사회적 실천의 작동에서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것은 안정성이다. 한 사회의 핵심적인 사회적 실천들이 안정적이지 않으면 그 사회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적 실천의 안정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자연적·사회적 환경이 변화할 경우 오히려 사회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게 되고, 그 결과 발생한 다양한 사회적 억압과 불평등에 대한 불만과 저항을 불러온다. 근대적 기획은 사회의 이 같은 극단적 비효율성을 대부분 폭력을 동반한 격렬한 방식으로 해결해왔는데, 이러한 정치전략은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진국가들에서 볼 수 있듯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훨씬 더 다양한 억압과 불평등에 대한 저항들이 분출되기 시작하는 후기 근대적 상황에서 기존의 정치전략은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다. 다양한 억압과 불평등에 대한 상충된 주장들 사이에 반성적 평형(Reflective Equilibrium)을 이루는 작업은 결코 근대적 기획에서처럼 소수 엘리트 간의 신속하고 강력한 논박과 대결 그리고 이어지는 명령과 강제의 방식으로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반성적 평형은 각 구성원이 갖춘 삶의 기술을 재조정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각 구성원이 근대 엘리트들의 전유물이었던 논박과 대결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여성운동에 대한 아고니즘 정치의 함의

  그렇다면 ‘정체성 정치’에서 ‘아고니즘 정치’로 사회개혁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한국의 여성운동에 어떤 구체적인 함의를 지니는가. 정체성 정치는 계층·인종·국가·지역·젠더에 의해 억압받는 집단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정의, 평등, 자유와 같은 당위적인 정치적 개념에 따라 저항을 전개한다면, 아고니즘 정치는 사회개혁 방식을 각 구성원이 상상하고 원하는 사회적 목표로부터 논박과 호응을 통해 각자의 판단기준을 구성하고 조정해나가는 동적인 정치전략으로 확장해 나간다. 이를 위해 각 구성원은 엘리트들이 제시한 몇 개의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어떤 사회적 실천이 효율적인가를 판단하는 적극적 자유를 구사할 수 있는 시민적 역량을 갖춰야 한다.
  예컨대 지난 20여 년간 한국여성운동은 정체성 정치에 기반을 둔 정치전략을 통해 성평등 정책의 성공적인 법제화를 이룰 수 있었다. 이 법제화 과정은 한국이 과거 경제발전과 정치 민주화를 이뤘을 때처럼 유례없는 속도로 이뤄진 전형적인 근대적 기획의 일환이었다. 통상적으로 제도개혁은 개혁 이후 서서히 구성원들 삶의 기술 변화로 이어지는 긴 조정과정을 거친다. 서구사회의 경우 여성운동의 제도적 성과가 사회적 실천의 변화로 이어지는 긴 조정과정을 누릴 여유가 있었다면, 한국여성운동의 제도적 성과는 1980년대에 정점을 찍은 경제발전이 새로운 사회적 실천의 형성으로 이어지는 긴 조정과정에서 신자유주의적 사회재편으로 급격히 왜곡되는 와중에 이뤄졌다.
  통상 신자유주의는 가격 정보에 따라 각 개인이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을 효율성 달성의 유일한 수단으로 보는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사회 전체를 재편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는 경제발전의 성과에 따른 그럴듯한 복지정책을 경험해보지 못했고, 구성원 간 신뢰를 바탕으로 사회적 자본을 형성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채 신자유주의화에 직면해야 했던 한국사회에서 속수무책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실천이론은 이를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매력인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한 행위성 발현의 지속과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폐해인 집단행동의 문제 해결 사이에서 최적의 절충 지점을 찾는 문제로 규정하고, 그 유일한 해결방법으로 각 구성원의 규범적 판단능력의 향상을 제시한다.
  이러한 실천이론의 방향성은 현재 진행 중인 한국여성운동의 변화에서도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최근 한국여성운동의 변화는 2015년 ‘메르스(MERS) 사태’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특히 ‘메갈리아’와 ‘워마드’라는 두 온라인 커뮤니티에 의해 채택된 정치전략이 논의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들 여성운동은 성공적인 성평등 정책의 법제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부장적인 법 실천에 대한 정당한 분노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성평등 정책의 법제화가 신자유주의적 사회재편 과정과 동시에 이뤄졌다는 사실로 인해, 이들 청년 여성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신자유주의 논리가 확산됨에 따라 피억압집단의 요구를 집단이기주의로 치부하는 경향이 더욱더 강해지고 있고, 가장 오랜 기간 진행된 불평등에 대한 정당한 저항인 성평등 정책에 대해 신자유주의적 공정성의 잣대를 들이대는 청년 남성들이 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실천의 동학과 새로운 정치전략

  한편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가 이 시대 청년 여성들과 남성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상황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실천이론의 정치적 구현인 아고니즘 정치에 따르면 청년들이 서로 공방을 벌이는 이러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들이 사회적 실천의 동학을 정확히 이해해, 각자가 자신에게 익숙한 삶의 기술로 이익·권위·권력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구성원 간 논박 과정을 통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용기를 발휘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고니즘 정치가 원활히 작동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수준 높은 시민적 역량이 필수적이다. 지금의 청년들은 비록 신자유주의화로 왜곡된 교육과정을 겪기는 했지만, 역사상 가장 높은 교육 수준을 자랑하는 세대이기에 이러한 변화를 기대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실천이론이 젊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주는 조언은, 자신들의 목표가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가 자유로운 세상이 되는 것이라면 그러한 사회로의 변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정치전략을 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실천이론은 한국사회의 역사적 발전과정의 특이성을 고려하지 않고 초기에 설정한 목표를 고집하면서, 서구의 여성운동이 고려하지 않았던 폐해까지 고려하며 정치전략을 변화시켜야 하는가라는 예상 가능한 질문에 오직 그 길만이 목표에 도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길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최근의 청년 여성운동의 상당 부분은 그동안 한국여성운동에서 취약했던 여성들의 경험을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는 문화적 도구들을 풍부하게 만들고, 또 그것을 활용할 다양한 기회를 제공했다. 하지만 어떠한 효과적인 정치전략도 다른 구성원들의 반응을 통한 지속적인 적응적 변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효율성을 유지할 수 없고 퇴행적 형태로 고착되게 된다. 삶의 기술을 지속해서 단련시켜나가야 하는 부담 없이 간결한 구호 아래 빠르게 세력을 확장해나가려는 근대의 단순한 정치전략으로 여성운동의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려면 오히려 더 먼 길을 돌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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