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순 /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장

[문화2] 국가기록의 발자취, 국가기록원의 역사

  보급화 된 개인 미디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일상을 습관처럼 기록한다. 그리고 매체 곳곳에서 ‘아카이브(ARCHIVES)’라는 용어를 어렵지 않게 마주친다. 사실 아카이브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기록 자체’ 혹은 ‘그 기록을 보존하는 기관’을 말하지만, 우리의 일상 속에서는 단순히 자료의 백업·보관 등의 의미로 사용하곤 한다. 이렇듯 용어가 문화 속으로 넓게 파고든 틈 사이로, 은연중에 인지하고 있는 기록과 아카이브의 의미 및 가치를 보다 질적으로 깊이 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사회적 기억으로서의 아카이브 ② ‘국가’의 ‘기록’, 그 중요성을 말하다 ③ 세계기록문화유산 ‘화성성역의궤’ ④ 기록물과 WWW, 디지털 아카이브의 시대

 

국가기록의 발자취, 국가기록원의 역사

김재순 /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장

  과거 1988년 제5공화국(이하 5공) 청문회 당시, 핵심 인물들의 “기억이 없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라는 일관된 답변에 국민들은 분노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관련 기록이 보존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필자는 이 시절을 거쳐 1992년 연구직 1호로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에 입사했다. 정부기록보존소는 본래 1962년 5월 정부의 중요 기록물 보존을 위해 개설된 내각사무처의 총무과 문서촬영실을 전신으로 한다. 이후 간첩 김신조 사건 등으로 남북관계가 심상치 않자 1969년 정부기록보존소로 개편돼, 본부조직은 당시 중앙청 뒤편에 입주하고 헌법을 비롯한 주요 정부기록들은 경북 경산의 조폐창에 임시로 보관됐다. 이후 1984년, 국토 후방인 부산 금정산 기슭에 기록물 보존서고가 별도로 설치됐다.

놀라운 기록 역사, 충격의 부실 실태

  입사 후 필자는 태백산사고에 남은 조선왕조실록 원본과 국무회의록 등 역사적인 국가기록들과 첫 대면을 하게 됐다. 태조부터 25대 철종까지 총 848책의 실록이 한 권도 빠짐없이 보존돼 있어, 사관들의 추상(秋霜)같은 기록 정신에 감탄했다. 다음으로 5공 청문회를 연상하며 국무회의록 서고에 들어갔다. 5·18 관련 회의록은 3쪽짜리 문서였다. 첫 쪽은 회의개최 일시(1980. 5. 22, 08:00~10:00) 등을 명기한 표지, 두 번째 쪽은 국무위원 참석자 명단, 마지막 쪽은 단 3줄의 회의내용이었다. “보고안건명 : ‘광주지역 난동사건’에 대한 보고청취” “보고자 : 계엄처장” “보고방법 : 챠트에 의한 브리핑 (이상)” 한마디로 실망스러운 문서였다. 이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 기록물을 찾아봤다. 문건 2건을 편철한 문서 1권이 유일했다. 국보위 관인등록 문서와 이 문서를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한다는 공문만 보존된 것이다. 과거 역사에 비해 현대사회 기록보존의 부실한 실태는 충격 그 자체였다.
  정부기록보존소는 1990년대부터 새로운 변화를 꾀했다. 행정직 위주의 기존 구성원에서, 역사학·문헌정보학·과학적 보존을 위한 물리화학 등을 전공한 전문인력들을 충원한 것이다. 이때부터 외국의 선진사례와 과거 기록전통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서구에서는 프랑스 시민혁명기를 거치며 국가기록의 보존과 사후 공개가 국민주권을 보장하는 핵심적 제도 장치임을 인지했다. 또한 미국은 국가기록관리청이 대통령 직속 독립기관으로서 입법·사법·행정부 기록물을 종합적으로 보존하고 공개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많은 나라에서 기록관리에 관한 기본법을 제정하고, 중앙정부는 중앙기록보존소, 지방정부는 지방기록보존소를 설치해 박물관 및 도서관과 더불어 학술문화의 산실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도 기록관리 법률제정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첫 시도는 김영삼 정부의 행정쇄신위원회에 법 제정을 건의하면서였다. 그러나 시기상조를 이유로 채택되지 못했다. 두 번째 시도는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가 이뤄진 김대중 정부에서 시행됐다. 북풍 공작 문서 파기 의혹 등이 일어난 상황에서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기록보존법 제정을 ‘새정부 100대 정책과제’로 선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윽고 일련의 입법 절차를 거쳐 1999년 1월 29일 자로 공공기관의 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공포됐고, 2000년 1월 1일부터 시행됐다. 1900년대 초 단절된 기록전통이 약 1세기의 공백기를 거치고 나서야 부활한 것이다.

과거 기록전통의 현대적 복원

  우리나라의 기록관리 제도는 외국과 비교해 큰 특징이 있다. 바로 사초(史草) 작성 등의 기록전통을 현대적으로 복원시킨 점에서 비롯된다. 첫째, 국무회의 등 주요 회의기구들은 사초처럼 회의록 작성을 의무화했다. 종래에는 최종 결재문서만 관리했지만, 입안부터 결과까지 기록으로 남도록 검토서, 메모 보고 등도 모두 보존되도록 했다. 둘째는 과거 사초의 누설이나 멸실 등을 참형으로 다스렸듯, 현대사회에서 기록물 무단파기 등을 엄격히 형사처벌하는 조항을 신설했다. 대통령기록 무단파기는 징역 10년 이하, 국무총리실 등 정부기록의 경우는 징역 7년 이하에 처하는 처벌조항을 둔 것이다. 다른 나라의 관련 법률에는 이와 같은 기록물 생산 의무와 강력한 형사처벌 조항이 없다.
  법률 시행을 계기로 기록물 이관량은 매년 폭증했다. 이에 5공 청문회를 거쳐 국고로 환수된 성남 소재 구(舊) 일해재단 부지에 중앙기록보존시설(Archives), 즉 현재의 나라기록관을 신축해 2008년 4월 개관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전자기록의 생산부터 이관·폐기 등 전 과정을 전자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또한 정부기록보존소라는 명칭을 국가기록원으로 변경하고, 직제와 정원도 대폭 확대했다. 1999년 법 제정 이래, 20여 년이 경과하며 수많은 변화 속에서 한국의 기록관리는 자리를 잡아 왔다. 국가기록원은 대통령기록과 정부기록, 민간·해외기록까지 종합적으로 보존하고 서비스하는 중앙 기록보존소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국회, 법원 등에도 자체 기록보존소가 설치됐으며 서울시, 경상남도 등 일부 지자체는 지방 기록보존소를 설치·운영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한계와 앞으로의 방향

  이 같은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국가기록은 여전히 근본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국가기록원의 위상이 낮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국가기록관리 기관은 차관급의 기관이지만, 한국의 경우 중앙부처의 소속기관에 불과하다. 그리고 입법·사법부 등에 대해서는 국가 전반의 기록물을 관리할 수 없는 입장이다. 일반적으로 기관장은 행정직의 순환보직으로 임명되고, 정무직인 장관의 지시에 따라 기록관리를 수행할 수밖에 없는 한계도 있다. 미국의 경우, 국가기록청장은 상원의 권고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하되 함부로 해임하지 못하도록 돼있다. 또한 입법·사법·행정부 전체기록물 역시 법령에 따라 30년 경과 후 공개원칙에 의해 기록물을 책임지고 공개한다. 이처럼 선진국의 중앙기록보존소들은 기록물의 생산 시점부터 분류해, 보존 기간을 적용하는 기능과 권한을 확립하고, 철저하게 관리해 이관받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국가기록원이 행정안전부의 소속기관이기 때문에 본부조직과 달리 정부 기관들을 대상으로 한 효율적 관리체계가 아직 정립돼 있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종래의 기록관리 부실 관행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실정이다. 예컨대 상당수의 회의기구들이 아직도 회의 요지만 작성하고, 사초와 같은 회의록 생산 의무를 지정하지 않는다. 또한 박근혜 정부 시기에 국가기록원은 세계기록총회 개최를 계기로 국민적 공감대를 조성해 도서관진흥법과 같은 진흥법을 제정해야 했으나, 당시 장관과 일부 학계 인사의 부당한 간섭으로 조직위원회 구성이 무산되기도 했다. 현 정부는 기록관리 개혁을 위해 처음으로 민간 출신의 전문가를 국가기록원장으로 임용했다. 이번 기회로 그동안 노정된 문제점들을 극복하고, 우리나라의 기록관리가 선진국에 못지않은 선진모델로 발전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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