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19.11.9 토 14:19
특집
[특집 기획의도] 나는 새가 아니요, 그 어떤 올무도 날 가둘 수 없다
김규리 편집위원  |  dc880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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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호]
승인 2019.09.03  22:3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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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의도] 새장 밖으로

 

나는 새가 아니요, 그 어떤 올무도 날 가둘 수 없다


  어떤 ‘감수성’이 있었다. 한국 사회의 가장 민낯의 ‘부끄러움’을 기어코 드러냄으로써, 한 시대의 혁명과도 같다는 평을 들은 어떤 감수성. 그의 글에서 주인공은 독자를 향해 자신의 위악적인 내면세계를 토해내듯 발설한다. 끊임없이 자조하며 고백하는 주체, 그들은 항상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문학연구자 강지윤은 〈개인과 사회, 그리고 여성〉(2017)에서 “역설적이게도 ‘고백한다’는 ‘내면’은 그 죄의식 자체를 독자로 하여금 감정이입하도록 하는 효과를 자아낸다.”고 서술한 바 있다. 혁명과도 같은 감수성이기에, 감정이입의 효과가 지나치게 강력했던 것일까. 오늘날의 남성들 또한 ‘고백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방송에서, SNS에서, 공석에서, 사석에서. 매체와 자리를 가리지 않고 쉼 없이 발설되는 그들의 고백에 우리는 알고 싶지 않았던 그들의 ‘찌질한’ 내면까지 곧잘 알게 되는 것이다.


고백하는 주체와 검열하는 주체

  그룹의 막내를 맡았던 어느 남성 아이돌이 경찰 조사를 오가는 작금의 현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정녕 짐작조차 못했나. 그가 토크 예능에 나와 자신의 사업가적 면모를 과시하고, 관찰 예능에서 자신의 상업적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치밀하게 짜여진 ‘하루’를 보여주며 스스로를 ‘위대한 승츠비’로 일컫는 사이, 우리는 그 어떤 조짐도 알아채지 못했나. ‘황금폰’은 무엇을 ‘사고 팔기’ 위해 존재했는지, 사용하지 않는 사람을 찾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보편적인 메신저 어플에서 오고 간 대화들이 그야말로 얼마나 ‘보편적인’ 내용이었는지, 사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의 무례와 위악을 허하는 사회와 사회의 아량 넓은 용인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죄의식을 토로하며 ‘그녀’로부터 구원받길 원해온 이들이 결국에는 ‘사고칠 줄 알았다’는 것이다. 용서를 구하든 구하지 않든 언제나 남성을 용서해온 한국 사회가 이제야 스스로의 견고한 믿음을 의심해보기 시작했다. 조국(祖國)의 너무 늦은 자기성찰을 바라보며, 지금까지의 그 고백들엔 진정한 반성이 선행하진 않았다는 씁쓸한 사실만 다시금 깨닫게 됐다.
  세상의 반틈이 수치도 모르고 본인의 수치를 고백하는 동안, 나머지 반틈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어떤 감수성이 세상을 자조적 고백으로 가득 채우는 사이, 여성의 감수성은 그 발화를 경청하고 위로하여 이내 구원해낼 것을 강요받았다. 남성 주인공의 입신(立身)에 ‘걸림돌’이 된다면 기꺼이 희생돼야하는 것이 한국 문학이 말하는 여성의 ‘도리’였다. 동시에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남성 주인공의 성장에 필요한 ‘통과의례’였다. 이 모든 것이 ‘마땅하다’는 인식적 관습에 기대 아무런 자성과 의심없이 이어지는 동안, 여성은 본인이 ‘걸림돌’이자 ‘통과의례’로서 충실한 역할을 해내고 있는지, 경청해야 하는 순간에 발설해버리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검열하고 내몰아왔다. 최근 몇 년간의 ‘페미니즘 리부트’를 통해 새로운 감수성의 혁명을 맞이한 여성들은 가장 먼저 새로운 언어를 찾았고, 말하는 방법을 배웠다. 오늘날 입을 연 여성의 발화(發話)는 이미 시발점을 지났다고 감히 진단한다. 다만 너무 ‘정상적인’ 말하기를 위해, 지나치게 ‘옳은’ 말하기를 위해 더 많은 여성들의 언어가 발화(發火)를 주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말하기를 주저하는 여성들에게는 체제에 비협조적이며, 본인 말하기에나 심취하는 반사회적인 수행이 필요해보인다. 그 내용이 영락없이 한심하든, 유별나게 전위적이든 아무래도 좋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게 하라

  항상 존재했고, 다시 도래한 여성들의 발화에 경청하기 위해 2019년도 하반기 대학원신문 특집호는 2018년 ‘미투 운동’의 촉발 이후 한국의 기성 문단과 출판계가 겪은 변동에 대해서 진단해보고자 한다. 본교 국어국문학과 이경수 교수님의 글을 통해 여성 교수자의 자리에서 이뤄지는 숱한 고민이 강단으로 이어지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들어보는 기회를 가진다. 문학에서의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자성의 목소리 없이 관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남성 중심의 한국 문학이 초래한 염증에 지친 우리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간직하고 있던 문학에 대한 애정을 다시 상기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편, 격렬한 구조 변동의 역사 앞에서 진통과 해방감을 동시에 겪고있는 새로운 문학과 새로운 독자들의 고민과 실천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 사회와 문단이 전에 없는 변화의 물결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 ‘퀴어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상상력을 꿈꾸고 나아가 실현시키고 있는 ‘독립출판사 움직씨’의 노유다와 나낮잠의 인터뷰를 담았다. 기획자이자 창작자인 두 사람에게 독립출판사를 운영하며 경험한 한국 문학계·독자·플랫폼의 변화 등에 대해 들어보는 지면이 되길 기대한다.
  정치면에서는 여성의 눈으로 정치사상의 역사를 다시 읽어봄으로써, 남성의 시선과 언어로만 구성됐던 정치적 시공간을 새롭게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장시간 노동체제’의 기원과 역사를 다뤄보는 노동면은 사회의 거대한 신화로 작동하고 있는 체제의 붕괴를 상상하며, 우리 세대의 자유에 대해 재고해볼 기회를 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앙아카데미아면을 빌어, 견고한 가부장 재현체계에 균열을 내는 한국 디지털 비디오예술의 시도를 살펴봄으로써 ‘정상성’을 의심하는 질의를 던져보고자 한다.


‘씀’이 ‘금’을 낼 것이다

  ‘나는 새가 아니요, 그 어떤 올무도 날 가둘 수 없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L.Montgomery)의 《빨간머리 앤》(1908)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드라마 〈Anne with an E〉의 부제이자 샬럿 브론테(C.Bronte)의 《제인 에어》(1847) 중 한 대목이다.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페미니즘의 운동성을 담아내는 이 문장이 주는 울림처럼, “내가 짓지도 않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저항하면서도 꼭 끝에 ‘E’를 붙일 것을 요구하는 앤이 건네는 응원처럼. 이번 특집호 또한 독자들이 숱한 고민과 성찰의 과정에서 외로움을 덜고 지속할 힘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라는 바다.
  본지는 특집호를 위한 청탁과 인터뷰를 진행하며 필자들에게 호소했다. 이 지면에서만큼은 꾸밈없는 고백도, 허무맹랑한 자기치장도 좋으니 지면을 빌어 한껏 이야기 해주십사. 누구의 기준일지 모를 형평은 잠시 잊고, 균형을 맞춰야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으며. 그렇게 이 신문 위에 여성의 이름을 하나라도 더 새겨두고 싶었던 본지의 염원이 담긴 특집호를 너그러이 반겨주길 바란다.

 

김규리 편집위원 | dc880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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