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평종 / 중앙대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예술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 - ④ 사진: 비틀어진 근현대사와 노순택의 ‘비상국가’]

  어떤 예술작품은 사회적 맥락과 역사 속에서 바라봤을 때 무게를 다르게 지니는 경우가 있다. 역으로, 역사적 사건이 창작자에 의해 또 다른 매체로 다시 표현될 때 사람들은 사건을 감동적인 이야기로
내면화해 새롭게 기억하기도 한다. 굴곡 깊은 한국 근현대사를 작가의 시각으로 오롯이 담아낸 작품들에 대해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덧붙인 이야기를 집중 조명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회화: 군사정권과 신학철의 ‘모내기’ ② 영화: 제주4·3과 영화 ‘지슬’ ③ 문학: 5·18과 소설 ‘소년이 온다’ ④ 사진: 비틀어진 근현대사와 노순택의 ‘비상국가’

▲ 노순택作  <애국의 길 Paths of patriot>_#BDD0101_110x160cm_장기보존용 잉크젯 안료프린트_2003_서울
▲ 노순택作 <애국의 길 Paths of patriot>_#BDD0101_110x160cm_장기보존용 잉크젯 안료프린트_2003_서울
한국은 ‘비상국가’다

박평종 / 중앙대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노순택의 <비상국가> 연작은 오늘의 한국사회를 상시적 위기상황으로 보고 그것이 한국 근현대사의 모순 구조와 어떻게 얽혀있는가를 시각적으로 탐색한 여러 개별 작업들로 구성돼 있다. 첨단 전쟁무기를 시연하는 에어쇼가 주제인 <Black Hook Down>(2006), 남북한이 어떻게 자신들을 표상하는가를 보여주는 <Red House>(2003~2007), 이념에 포획된 다양한 집단의 광기를 다룬 <애국의 길>(2003~2004), 광주 망월동 묘역의 영정사진을 촬영한 <망각기계>(2012)가 여기에 포함된다. 또한 이 작업에는 정부 권력에 저항하는 시민사회와 생존권 수호를 위해 투쟁하는 개별 집단에 관한 동명의 연작 <비상국가>(2000~2007)도 들어있다. 그러나 작가는 상이한 주제에 걸쳐있는 자신의 작업 대다수를 <비상국가> 연작에 포함시킨다. 이 모든 문제가 결국 ‘비상국가’라는 화두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왜 ‘비상국가’일까.

비상국가는 ‘분단’에서 비롯됐다

  실상 <비상국가>는 작가가 초기 작업에서부터 줄곧 화두로 삼아온 분단 문제와 뗄 수 없이 연결돼 있다. 말하자면 분단은 한국이라는 법치국가를 상시적 비상국가로 변질시킨 근본 모순이다. 그리고 이 모순은 <비상국가> 연작을 구성하는 다른 개별 작업들의 바탕에 똑같이 깔려있는 공통분모다. 작가는 첫 개인전 <분단의 향기>(2004)에서 이미 분단 상황이 우리의 일상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있는지, 그로 인한 ‘비정상적’인 상황에 우리가 얼마나 둔감해져 있는지를 냉소적인 시선으로 포착해 보여줬다. 그에 따르면 분단이 초래한 위기상황은 일상의 풍경이 됐다.
  이후 진행한 <얄읏한 공>(2006) 연작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미군기지 철수 문제로 첨예한 갈등의 진원지가 됐던 평택 대추리 인근의 ‘레이돔(Radome)’을 추적한 이 작업에서 마치 거대한 ‘공’처럼 보이는 레이돔은 사실 고도의 전쟁무기임이 확인됐다. 작가는 이 정보수집 장치를 골프공이나 탁구공처럼, 때로는 보름달처럼 풍경의 일부로 보이게끔 촬영했다. 하지만 이 ‘얄읏한’ 공은 결국 분단 상황을 극명히 상징하는 ‘위험한’ 장치다. 게다가 이 감시 장치는 대추리 인근 어디를 가더라도 볼 수 있다. 즉, 역으로 말하자면 누구도 감시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는, 평화롭게 보이지만 실상은 은폐된 ‘위기상황’인 것이다.
  <좋은, 살인>(2008~2010) 연작에서도 위기는 계속된다. 소위 ‘에어쇼’라 불리는 전쟁무기 연습장면을 촬영한 이 작업에서 작가는 최첨단 전쟁무기의 화려한 ‘곡예’가 사실은 ‘살해’의 제스처임을 흥미롭게 형상화해냈다.

변질된 분단풍경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씁쓸하고도 코믹한 풍경, 때로는 아이러니하고 때로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갖가지 현상이 생겨난다. 예컨대 <분단의 향기>(2000~2004) 연작 가운데 북한군 복장의 군인과 남한 병사가 연습을 끝내고 밥을 먹기 위해 함께 줄 서 있는 모습이 그렇다. 모의연습에서는 서로 총부리를 겨누던 그들이 결국 ‘동료’였다는 진실이 곧 한반도의 현실인 것이다. 또한 <애국의 길>에서 보수단체가 한미동맹을 강조하기 위해 태극기와 성조기를 나란히 사용하는 모습은 <분단의 향기> 연작 중 “미국사람 아닙니다!”는 문구가 박힌 상의를 입은 한 외국인의 모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Red House>는 반세기 이상 지속된 분단의 고착화로 본래 하나였던 두 국가가 얼마나 이질적으로 변질됐는지 극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제 분단 ‘풍경’은 ‘스펙터클’로 바뀌었다. 휴전선 인근 전망대는 기념촬영 ‘명소’가 됐고 북쪽의 산천은 ‘입체영상’으로 판매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북쪽도 다르지 않다. 체제유지를 위해 설립한 다양한 흔적이 도처에 널려있고, 그 상징물들은 북한의 주요 관광지를 점령한 상태다. 

▲ 노순택作  <붉은 틀 Red House I>_#BFK097_110x160cm_장기보존용 잉크젯 안료프린트_2005_평양
▲ 노순택作 <붉은 틀 Red House I>_#BFK097_110x160cm_장기보존용 잉크젯 안료프린트_2005_평양

  실상 분단은 냉전 시대의 질서로 우리에게 강제된 것이었다. 이후 냉전 체제는 세계사적 관점에서 무너졌고 이념대립도 퇴색됐다. 그런데 여전히 분단의 질서가 작동하는 한국사회의 이념대립은 더욱 극단화되고 있다. <애국의 길>이 냉정하게 보여주듯 이데올로기는 각종 집회에 ‘비논리적으로’ 동원돼 쓴웃음을 자아내게 하며 거기에는 광기마저 섞여있다. 그 강고한 신념의 배후에는 ‘국가’가 있다. 말하자면 ‘그들의’ 국가를 지켜내기 위해 이념이 동원된다. 그러나 실상 그들이 신뢰하는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고 주권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선한’ 권력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통제·억압하는 ‘악한’ 권력으로 작동한다.

통치권력과 희생양

  국가, 다시 말해 국민주권 국가는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추상적’ 장치다. 하지만 이 ‘상식’은 비상국가에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비상국가는 오히려 무소불위의 행정 권력을 동원해 주권자를 위협한다. 이 상황은 아감벤(G.Agamben)이 제안한 개념인 ‘예외상태(Stato di Eccezione)’와 만난다. 핵심은 행정 권력이 상시적 위기상황을 지속시킴으로써 법질서가 통용되지 않는 초법적 질서를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법치는 국민주권 국가를 지탱하는 초석적 질서다. 그런데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위기상황에서 이 전제는 일시적으로 유예될 수 있다. 전시상황이나 계엄령이 그 예다. 그런데 ‘예외상태’에서는 행정 권력이 위기를 가장해 법질서를 지속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 때 행정 권력은 법 위에 군림하는 초법적 질서로 작동한다. 노순택의 <비상국가>가 보여주는 행정 권력과 주권자 국민 사이의 충돌은 이런 상황에서 극단으로 치닫는다. 여기서 국민은 주권자가 아니라 통치 권력의 희생양이 된다.
  가장 첨예한 예는 <망각기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광주 망월동 묘역의 영정사진을 촬영한 이 작업에서 희생자들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훼손돼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들의 얼굴과 신원은 기억 저편에 묻혀있다. 실상 5.18 광주는 통치 권력이 법질서를 무력화시키고 주권자를 희생물로 삼아 ‘비상국가’를 만들어낸 극단적인 사례다. ‘비상국가’에서는 무고한 누구라도 희생자가 될 수 있으며, 이런 상황은 우리의 근현대사 전체를 관통해 왔다. 문제는 이런 비극적인 역사가 점차 망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망각기계>는 관람자로 하여금 이 곤혹스러운 진실과 대면하게 함으로써 과거의 기억을 복원시키고 나아가 오늘의 한국사회가 처한 현실을 환기시켜 준다. 결국 이 작업들의 묵직한 전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분단과 더불어 ‘비상국가’에서 살아왔고, 여전히 ‘비상국가’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위험한’ 국가에서 계속 살아갈 것인지,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우리는 후세에게 ‘비상국가’를 물려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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