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기록원 학예사

[학술] 구술, 하나의 학문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 ④ 근현대 예술사의 공백을 메우다

  구술사는 민중의 체험과 기억을 역사 담론의 장으로 끌어낸다는 점에서 민주적 기능을 한다. 국내에서는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한 사회운동으로부터 촉발된 구술사 연구가 소외된 여성사와 민주화 운동의 기록 및 근현대 예술사의 공백을 메우는 중요한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 구술사의 역사와 현재를 되돌아보고, 그 성과와 나아갈 방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한국구술사의 전개 과정 ② History에서 Herstory로, 여성의 이야기를 기록하다 ③ 기억의 역사를 기록의 역사로 ④ 근현대 예술사의 공백을 메우다 

■ 한국근현대예술사예술사 구술채록 현장 사진. 아르코예술기록원 제공
■ 한국근현대예술사예술사 구술채록 현장 사진. 아르코예술기록원 제공

예술사 연구를 위한 구술채록 방법론의 수용

정보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기록원 학예사

  2003년, 당시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하 문예위)은 예술사 구술채록 사업을 처음으로 시행하며 두 가지 목표를 설정했다. 첫째로는 한국근현대예술계 원로 예술가 100인을 선정해 이들로부터 예술사적 가치가 있는 증언을 채록하고, 문자기록이 부실한 시대의 예술사료를 확보하는 것. 둘째로는 생산된 영상기록물이 향후 예술사 연구 및 교육을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범 예술계 숙원이기도 했던 ‘20세기 마지막 예술가들’의 구술확보를 위해 동 사업이 출발했으며, 현재는 문예위 아르코예술기록원의 사업으로 17년간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구술채록이라는 방법론은 한국 근현대예술사 연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실효성 있는 방법이었는가.

구술채록, 문헌사의 결락과 공백을 메울 수 있을까

  구술채록사업 착수를 위한 기초설계 연구팀에서 설정했던 목적은 ‘문헌기록의 심각한 상실과 결핍을 보완하고, 문헌자료의 분석과 이해를 촉진시켜 한국의 예술사를 맥락화 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참여했던 연구진 대부분은 구술성에 기반한 자료읽기와 글쓰기 방식에 다소 생소했다. 그들이 당면했던 주요 과제는 예술사를 어떻게 구술사 방법론과 조화롭게 교차시킬 것인가, 즉 개인들의 주관적 구술기록을 어떻게 보편적 가치로 길어 올려 어떻게 학문적으로 정초할 것인가였다.
  구술채록이라는 방법론의 도입으로 과거의 원풍경을 재구(再構)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 사업 착수 초반의 열기는 대단했다. 예술계 전방위적으로 문헌사 연구를 이미 충분히 해온 전문가들로 사업추진체계가 꾸려졌다. 그러나 채록이 거듭될수록 당초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연구자들의 고민은 깊어졌다. 원로 예술가의 구술을 통해 과거의 원풍경을 그려내고자 했던 기대와는 달리 구술자들의 회고는 문헌사에 누락된 부분을 대체할 만큼의 일관성도, 객관성도, 대표성도 담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술자료의 심각한 빈곤을 타개해야 한다는 당위성, 살아있는 예술가들의 생애체험과 육성을 기록해야한다는 절박함이나 시급성과는 별개로, ‘예술사 연구에 있어 구술채록 방법의 요청근거는 무엇인가’라는 근본문제가 연구자들의 마음 한편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원인의 핵심은 ‘구술’ ‘채록’이란 방법론의 올바른 이해와 실행을 둘러싼 문제로 수렴됐다.

본질에 맞는 접근과 기록화가 필요하다

  ‘구술(口述)’ ‘채록(採錄)’은 자료생산출처와 그 기록방식을 가리킨다. 글자 뜻 그대로 보자면 ‘입으로 표현한 것’을 ‘캐서 기록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아주 간단한 사항이지만 그 안에 구술 자료를 대하는 그간의 인식과 관행, 구술채록결과물의 특성과 관리·활용 방법이 함께 내포돼 있다.
  우선 구술은 ‘현재’의 ‘나’, 즉 발화자에게 ‘의미 있는 경험’에 대한 ‘선택 및 재구성’의 결과다. 구술을 통해 명확히 드러나는 지점은 객관적 사실의 재현이 아닌 의미의 영역이며, 우리의 기억은 ‘과거에 대한 동일 반복적 소환’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의 연장선상에서 지속되는 생성의 문제’라는 점을 전제할 필요가 있다. 과거를 회고하는 구술내용은 구술 시점에 개인과 사회를 둘러싼 쟁점, 이에 대한 구술자의 생각 또는 입장과 긴밀하게 연결된 의미부여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구술은 발화자(구술자)와 청자(채록연구자) 간의 개별적 상황과 관계 형성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이는 어느 시점에, 어떤 상대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어떤 자리에서 임하느냐에 따라 구술 수행 여부가 결정되며, 설사 비슷한 시점에 같은 사람과 같은 주제를 다시 이야기한다 해도 구술내용의 깊이와 방향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구술내용은 사실과 정보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시대적 경험·가치관의 변화·일정한 사안에 대한 판단과 결정 등과 같은 해석과 신념의 영역이기에, 구술자들의 발화맥락과 취지에 대한 다층적이고 복합적 접근이 필요한 기록물임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채록, 즉 ‘캐서 기록한다’함은 면담현장, 면담기류의 변화, 전체 상황을 온전히 담는 것이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발화 시 말투·눈빛·감정 등 비언어적 요인들, 침묵과 반복 역시 구술자의 서사 분석을 위한 중요한 정보다. 구술은 일종의 연행이기 때문이다. 구술자의 발화맥락을 충분히 보존하지 못한 결과물이나, 구술과정과 발화맥락보다 단편적 사실정보에 더 주목하는 접근방식은 실제 수많은 구술기록이 생산되고 있음에도 구술성에 근거한 연구의 진척을 어렵게 하는 대표적 장애요인이기도 하다.
  구술채록은 ‘사람을 기록하는 일’이다. 예술과 인생이 분리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볼 때, 특히나 곡절 많은 한국 근현대 격변기를 온몸으로 버텨온 원로 예술인들의 삶과 예술사적 체험을 기록한다는 것은 반문의 여지가 크지 않다. 강조하지만, 문제는 기록 생산의 방향과 이에 적합한 관리·활용 방법의 강구다. 사업 착수 당시, 예술사 연구를 위한 구술채록 방법론 도입을 둘러싼 기초설계 연구팀의 고민과 문제의식은 추진방향의 설정을 위한 중요한 밑거름이 됐고, 본질적인 접근을 위한 소중한 유산이 됐다.
  구술자들은 특유의 몸짓과 얼굴표정, 자부심 혹은 회한이 섞인 목소리와 감정으로 지난 생애를 표현한다. 눈빛이나 침묵 역시도 또 다른 언어다. 구술자의 말이 침묵보다 더 비밀스러울 수 있고 구술자의 눈빛 한 줌에 반세기 인생이 단박에 묻어나기도 한다. 구술자의 발화내용 그 자체를 역사사료로 보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발화배경과 발화맥락을 두루 면밀히 살핌으로써 구술자 내면의 서사적 진실에 깊이 다가설 수 있다. 구술기록의 사료가치는 단순히 역사자료의 공백을 메꾸는 결락기록의 확보 차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기록을 통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기존의 역사 영역에 대해 ‘왜’, 그리고 ‘어떻게’를 질문하고, 문자화될 수 없는 다양한 비언어적 요소를 포괄적으로 고려하는 데 있다. 이를 통해 객관적 사실정보라는 것이 실은 얼마나 피상적이고 표피적일 수 있음을, 그리고 우리가 예술사 연구를 위해 참고해야 할 또 다른 지점이 있음을 시사한다.

구술로 빚은 예술인생, 그리고 영구적 아카이브

  아르코예술기록원에서는 구술자의 말과 몸짓, 사투리 등 언어습관, 그들의 삶과 인생이 담긴 생활환경을 담아낼 수 있는 현장을 방문해 영상으로 기록해왔다. 다채로운 화면구성과 화려한 영상 연출은 없지만, 발화맥락에 대한 온전한 보존을 목적으로 구술내용 전 분량 촬영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구술자료 활용의 편의성과 자료로서의 품질가치 제고를 위해 구술채록문도 발간하고 있다. 구술채록 본문은 음가기술 원칙을 통해 구술내용과 흐름을 문자화하되, 구술 당시 기억의 착오로 내용에 정정이 필요하거나 구술맥락에 대한 상세 설명이 필요한 경우, 혹은 구술내용에 대한 채록연구자의 관점 등을 ‘각주’에 기술해 보완한다.
  구술기록은 통칭으로서의 예술가가 아닌, 구체적 개개인들의 삶을 깊이, 다시, 두루 봄으로써, 시대와 인간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게 한다. 이는 우리에게 예술은 무엇인지, 기존의 예술사 서술내용을 재고할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들의 생애기록을 영구적으로 보존관리하기 위한 아카이브의 구축은 필연적 귀결이다. 그렇다면 기록관리 대상물로 구술기록의 증거적 가치와 위상이 확보됐다고 볼 수 있는가의 문제와 다시 마주한다. 통상 ‘아카이브’라 한다면 역사적 증거물로서 영구적 보존가치가 인정된 기록물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애초에 사업 기초설계 연구팀에서 문제시했던 구술사와 예술사는 조화롭게 교차될 수 있는가의 문제로 회귀하는 것이다. 고민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 둘이 서로 별개라 할 수도 없고, 어느 하나의 보완근거로 예속될 수도 없는, 여전히 불편한, 어쩌면 예술사 연구의 질적 향상을 위해 앞으로도 불편해야 하는 길항관계에 놓여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구술자료는 예술사 연구를 위한 구체적 근거자료로서의 의미에 그치기보다는 우리가 사료를 보는 관점, 예술사 서술방식, 학(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계속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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