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필 / 국어국문학과 박사

중앙아카데미아: 『김수영의 참여시론 연구』 문종필 著 (2019, 국어국문학과 박사논문)


본 지면은 학위 논문을 통해 중앙대 대학원에서 어떤 연구 성과가 있는지 소개하고, 다양한 학과의 관점을 교류하고자 기획됐다. 이번호에서는 국어국문학과 문종필의 박사 논문 『김수영의 참여시론 연구』를 통해 ‘의식’의 그림자화를 의미하는 증인부재 도식을 탐구하고, 본 개념을 통해 김수영의 참여시론을 이해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참여시의 새로운 이해, ‘자동기술’의 윤리

문종필 / 국어국문학과 박사

  김수영은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1965)에서 박인환에게 수모를 겪은 사실과 ‘예술부락’ 창간호에 수록된 자신의 시 〈묘정의 노래〉(1945)가 모더니스트들로부터 푸대접을 받은 사실을 고백한다. 당시 모더니스트들은 작품 속에 사회의 내재성을 드러내고자 했지만, 이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하지만 1960년 4·19를 계기로 다시 ‘참여’가 부각되자 김수영은 〈참여시의 정리〉(1967)에서 지난 과거에 느꼈던 치욕을 잊지 않고, 모더니스트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회상한다. 이 과정에서 언급된 개념이 ‘증인부재 도식’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1968)에서도 언급되는 이 개념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온몸의 시학’과 흡사하며, 본 텍스트가 김수영 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감안할 때, 반드시 연구돼야 할 개념이다. 다만, 김수영의 ‘증인부재 도식’은 그가 오독한 프로이트의 이론으로 인해 난해하게 적혀져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참여시’와 관련해 김수영은 두 번의 논쟁을 치른다. 시인 전봉건과의 ‘사기시(詐欺詩) 논쟁’과 평론가 이어령 사이에서 불거진 ‘불온시(不穩詩) 논쟁’이 그것이다. 1964년 김수영은 〈‘난해’의 장막〉에서 전봉건의 시와 시론을 비판하고, 이에 전봉건은 〈사기론-김수영 시인에게 부쳐〉(1965)에서 김수영에 반기를 들며 자신의 시와 시론을 옹호한다. 그는 김수영이 주장한 ‘현실의 직시’를 투박한 현실참여라 주장하며, 김수영의 난해시가 대중들에게 읽힐 수 없어 ‘현실참여’가 불가능함을 피력한다. 김수영은 다시 〈문맥을 모르는 시인들-사기론에 대하여〉(1965)를 쓰며 전봉건을 비판하고, 이에 전봉건은 〈참여라는 것〉(1966), 〈토대없는 참여의 시〉(1967)로 답하며 ‘사기시’ 논쟁은 끝을 맺는다. 전봉건의 ‘참여시’에선 ‘사회 참여’가 표면적인 사회참여인 반면, 김수영은 표현 방법에 문제를 두기보다는 윤리적인 행위에 초점을 뒀다. 이는 기존에 통용되고 있는 참여시와는 ‘결’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어령과 벌인 ‘불온시 논쟁’에서는 억압된 ‘자유’가 문제시됐다. 억압된 현실로 인해 ‘불온’하지도 않은 평범한 시가 ‘불온한 것’으로 간주될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이 논쟁에서 김수영은 ‘참여시’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나’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참여시를 설명하고자 했다. 다만 이런 행위가 ‘오늘날의 참여 문학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나’를 통해 ‘참여시’의 미래를 논했다.

  중요한 것은 ‘사기시’ 논쟁에서 얻어낸 ‘윤리적인 태도’와 ‘불온시 논쟁’에서 얻어낸 ‘나’의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증인부재 도식’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것이다. 김수영은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1966), 〈평균 수준의 수확〉(1966), 〈새로운 포멀리스트들〉(1967), 〈진정한 참여시〉(1967), 〈참여시의 정리〉,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참여시’의 문제를 꾸준히 진단한다. 이러한 ‘참여시’의 문제는 두 논쟁과 무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증인부재 도식’이다.

■ 출처: 김수영문학관
■ 출처: 김수영문학관


난해한 개념인 ‘증인부재 도식’

  본 논문에서는 프로이트 심리학에서의 무의식 개념을 밀어내고 들뢰즈와 과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1972)에서 논한 ‘자기-생산’적인 무의식 개념을 제시했다. 주체는 무의식을 능동적으로 ‘자기-생산’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산’이다. 김수영은 시평 〈요동하는 포즈들〉(1964)에서 김구용의 〈거울을 보며〉를 “얼마 동안 ‘무의식’의 유희에 젖어 있던 붓으로 의식의 세계를 그려보려고 할 때, 그의 붓에서는 갑자기 무의식이 녹이 슬기 시작한다.”고 비판한다. 김수영에게 ‘무의식’이란 녹슬지 않게 다룰 수 있는 대상이다. 〈포즈의 폐해〉(1966)에서는 이승훈의 시로부터 ‘무의식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의식’를 논하며, ‘무의식’을 알 수 없는 대상이 아니라 움직일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에 따르면 ‘무의식’은 태생부터 만질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꿈이나 실수 등 ‘헛디딤(Achoppement)’의 형태로 출현하고 표현된다. 그러나 김수영에게 무의식이란 ‘만질 수 있는 대상’이다.

  김수영에게 무의식은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훈련 후에는 익숙해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시 말해, 훈련을 통해 없던 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길 만듦은 헤겔의 ‘습관’ 개념과 만난다. 헤겔은 《정신철학》에서 “자기 자신의 순수한 지반에서 활동하는 완전히 자유로운 사유도 마찬가지로 습관과 능숙함을 필요로 한다. 사유는 직접성의 이러한 형식에 의해서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삼투된 내 개별적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물이 된다. 이러한 습관에 의해서 비로소 나는 생각하는 존재로서 나에 대해서 실존한다.”고 기술했다. 습관은 낡은 관념이 아니라 자유 영역에 놓인 최선봉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피노자의 《윤리학》 2부 정리 16, 17, 18은 습관이 형성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자기를 보존하려는 코나투스(Conatus)의 힘이 외부 원인에 의해 다른 코나투스를 생성시킬 수 있다는 논리는 인간 신체를 무의식‘화’하는 ‘습관’의 영역과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김수영은 〈시작노트2〉(1961)에서 “나의 경험으로 비춰볼 때 형식은 ‘투신(投身)’만 하면 간단히 해결된다”고 적었을 뿐만 아니라 “시인이라는, 혹은 시를 쓰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큰 부담이 없다. 그런 의식이 적으면 적을수록 사물을 보는 눈은 더 순수하고 명석하고 자유로워진다.”고 적었다. 또한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기교에 대해 다루면서 “의식할 때는 진정한 기교가 못”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의식의 무의식‘화’와 무관하지 않다. 더 나아가 이러한 생각은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을 떠오르게 한다. 김수영의 산문 〈글씨의 나열이오〉(1967), 〈반시론〉(1968), 〈와선〉(1968)에서 확인되는 초현실주의 성격은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무의식‘성’을 김수영 스스로 ‘자기-생산’ 했다는 점이다.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 우연을 만들어낸 것이다. ‘증인부재 도식’은 ‘의식’의 그림자‘화’를 통해 그림자의 방식으로 시를 쓰는 행위를 의미한다. 바로 이 방법론이 ‘증인부재 도식’이다.


‘증인부재 도식’의 개념화 작업

  〈참여시의 정리〉(1967)를 기점으로, 김수영은 ‘참여시’의 논의를 확장해 ‘진정한 참여시’를 본격적으로 서술하게 된다. 그는 ‘진정한 참여시’를 ‘증인부재 도식’을 통해 설명한다. 그러나 ‘증인부재 도식’ 형태가 ‘무의식’과 ‘의식’이라는 단어로 구성돼 발생하는 난해함을 설명하기 위해, 본 논문은 ‘증인부재 도식’의 속성을 파악하고자 했다.

  ‘증인부재 도식’의 핵심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시에서는 의식은 증인을 가질 수 없지만, 그림자를 통해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김수영은 ‘증인부재 도식’과 ‘죽음’의 개념이, 유치환의 〈칼을 갈라〉(1955)로 비유되는 ‘이성적인 시’와 박인환으로 상징되는 ‘이성을 부인한 모더니스트들의 시’가 완성하지 못한 지점을 채울 수 있다고 믿었다. 행위로서의 ‘죽음’은 해명하는 데 어려움이 없던 반면, ‘의식’의 ‘그림자’화는 세밀한 규명이 필요했다. 김수영이 쓴 전체 글에서 ‘의식’이라는 단어를 추적해 갈무리해 보면, ‘정직한 생활의 내면화·시적 기술의 사라짐·욕망과 욕심 지우기’를 강조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이 세 가지 특징을 품고 죽음의 방식으로 이행하는 것이 ‘증인부재 도식’이 지닌 속성이다.

  김수영이 행한 ‘의식’적인 노력은 생활 측면에서 정직한 몸을 만드는 것이었고, 기술적인 언어의 운용을 습관의 영역으로 돌리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영역까지 확장돼 욕망과 욕심을 지우고자 했다. 더 나아가 그는 ‘죽음’의 방식으로 이 세 요소를 밀고 나갔다. 의식적으로 자신의 몸을 윤리적으로 수련했던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증인부재 도식’과 ‘죽음’ 개념으로 얻어낸 결과물을 새롭게 명명하기로 했다. 의식의 자유로운 속성을 ‘자동기술’ 개념으로, 낮은 자세로 대상과 현상을 대하는 태도를 ‘윤리’로 이름 붙여 ‘자동기술의 윤리’로 명명했다.

  ‘자동기술의 윤리’는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개념에도 갇히지 않는 자유의 속성을 선물해 준다. 이 개념은 기존의 ‘참여시’를 지워버린 후, 새로운 ‘참여시’를 재생하게 만든다. 지금, 이곳의 ‘나’를 알레고리화 할 수 있기 때문에 늘 항상 ‘이곳’의 시간과 함께 전진한다. 하지만 ‘자동기술의 윤리’는 김수영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마음껏 펼쳐지지 못했다. 오직 〈풀〉(1968)만이 성공적으로 ‘자동기술’의 윤리를 통과한 첫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이 된다. 이 지점을 새롭게 훈련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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