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종 / 서울과학기술대 강사

‘오래된’ 발전국가에 관한 ‘새로운’ 질문

박찬종 / 서울과학기술대 강사

  발전국가론은 1980년대 초 찰머스 존슨(C.Johnson)에 의해 처음 제기된 이래, 이른바 ‘시장주의적 관점’에 대항하는 유력한 입장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1970년대의 경제위기를 거쳐 1980년대부터 강도 높은 시장주의적 개혁을 경험한 서구와 달리, 개입주의적 정책을 유지하면서도 1990년대 초까지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을 지속했던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험은 발전국가론의 강력한 전거가 됐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나타난 일본의 ‘잃어버린 20년’과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는 발전국가에 관한 새로운 논쟁을 촉발시켰다. 이러한 위기가 이미 시효가 만료된 발전국가의 지속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시장주의적 압력에 의한 발전국가의 때이른 해체에서 비롯된 것인지의 논쟁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위기의 원인을 둘러싼 ‘발전국가론 논쟁’의 이면에는 그동안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던 숨은 쟁점이 존재한다. 발전국가론 내부에는 두 가지의 상이한 ‘발전국가’ 개념이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관점은 발전국가를 특정한 ‘성장모델’이자 ‘성장전략’으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이 관점에서 발전국가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성장 원인으로 파악되며, 특히 발전국가 성장모델 형성에 기여했던 정부·기업·은행과 같은 행위자들의 전략에 초점이 맞춰지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의미의 발전국가는 다른 저발전지역으로 수출될 수 있는 일반적 성장모델이자, 경제행위자들의 의지만 있다면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다시 부활할 수 있는 대안적 성장전략으로 제시된다. 반면 두 번째 관점은 발전국가를 고도성장기에 형성된 특수한 역사적 산물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성장모델로서의 발전국가’와는 달리, 이 관점에서는 발전국가와 경제성장 사이의 단선적 인과관계는 상대화되거나 해체된다. 1960~70년대의 고도성장은 당시의 세계경제 및 지정학과 같은 역사적·구조적 조건의 산물이며, 이러한 조건들이 경제성장과 함께 독특한 국가형태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는 ‘발전국가의 신화’가 아닌 ‘발전국가의 역사적 현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오형석의 논문은 후자의 관점을 채택한다. 그는 발전국가의 전환기에 주목하며, 1997년 ‘한보사태’를 사례로 이러한 전환의 역사적·구조적 조건을 해명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기존의 지배적 해석들은 외환위기의 원인으로 과잉투자 및 정실주의(시장주의)를 지목하거나 혹은 정부의 무분별한 자유화정책(국가주의)을 지목하는데, 결국 주요 행위자들의 비합리성을 원인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동일하다. 오형석은 당시 정부와 재벌의 ‘상황적 합리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곧 정책적 원인이 아니라, 구조적 원인에 주목하자는 제안이다. 본 논문은 결국 외환위기의 원인에 관한 제3의 설명을 시도한 것이다.

  ‘발전국가의 전환’을 대상으로 하는 본 논문의 또 다른 중요성은 바로 이 ‘전환’의 의미를 보다 분명히 하는 데 있다. 사실 기존의 많은 연구들은 ‘국가 대 시장’이라는 틀에 의존하면서, 발전국가를 강도 높은 개입주의적 국가와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에서 경제적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모든 자본주의 국가는 개입주의 국가다. 따라서 발전국가의 전환을 개입주의적 국가에서 비개입주의적(혹은 시장주의적) 국가로의 이행이라고 보는 것은 과도하게 단순한 시각이다. 또 다른 오해는 발전국가와 신자유주의 국가의 정책목표가 서로 명백하게 구별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저자가 강조하듯이, 발전국가는 경제성장을 목표로 하는 개입주의 국가 일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개입 방식·개입 수단을 행사하는 국가를 지칭한다. 즉 정책의 ‘목표’가 아닌 ‘수단’이 발전국가를 규정한다. 미시적 경제정책수단을 중심으로 경제관리를 운영하는 국가가 발전국가라면, 발전국가가 전환된다는 것은 이러한 미시적인 직접적 정책수단이 더 이상 효과를 발휘할 수 없게 돼 거시적 경제정책의 간접적 수단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전국가 시기의 미시정책이 더 이상 지속불가능한 구조적 환경에서, 각 행위자들의 해석과 그에 기초한 ‘합리적’ 대응들은 역설적으로 발전국가의 순조로운 이행이 아니라 외환위기와 같은 파국으로 귀결됐다. 저자에 따르면, “한보의 사례는 한국 발전국가의 순조로운 전환의 불가능성을 상징한다”.

  끝으로 논문의 독자로서 남아있는 궁금증을 표현하고 싶다. 첫째, 저자는 구조적 변화에 대한 행위자들의 합리적 대응이 한보의 부도라는 비합리적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주지만, 사실 한보사태의 가장 결정적 요인이었던 은행들의 ‘우유부단함’ 혹은 정책신호의 오판은 ‘비합리성’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은 아닌가. 둘째, 만약 발전국가의 ‘순조로운’ 이행이 이뤄졌다면, 즉 위기를 경험하지 않은 채 한국에서 기존 발전국가의 자연적 소멸이 진행됐다면, 현재의 신자유주의와 어떻게 달랐을까. 신자유주의로 규정할 수 없는 다른 성격의 사회였을까, 아니면 ‘다른 얼굴의’ 신자유주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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