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화철 / 한동대 교양학부 교수

속도를 사유하기 ③ 초연결사회와 속도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까지 모든 것이 연결되는 초연결사회가 가공할만한 편리함을 가져왔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원하는 정보는 언제 어디서나 순식간에 검색되고, 공간이동의 제약은 점차 무의미해져 간다. 그러나 너무 많은 연결과 접속은 어느 순간 삶의 피로를 가중시킨다.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말미암은 이러한 현상은 어떻게 기술될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속도의 철학자, 폴 비릴리오 ② 맑스주의와 속도 ③ 초연결사회와 속도 ④ 속도에 저항하기

 

‘초연결사회’의 삶의 형식과 속도

손화철 / 한동대 교양학부 교수

  우리는 언제부터 속도에 집착하게 됐을까. 기술발전에 있어 속도가 그 자체로 하나의 가치가 되고, 모든 면에서 속도를 높이는 것이 기술의 핵심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과거에도 공간 이동을 빨리하려는 욕구는 있었겠지만, 이는 달리기나 동물을 이용해 얻는 속도가 한계치였고 기술이 개입할 여지는 별로 없었다. 제작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더 아름답거나 웅장하게 만들기 위해, 혹은 더 정교하거나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속도는 얼마든지 희생됐고, 그 아름다움과 정교함을 얻은 후에도 속도를 더하기 위한 노력을 따로하지 않았다.


현대기술과 속도

  본격적으로 속도에 의미가 부여된 계기는 근대에 발견된 물리적 시간의 개념, 그리고 그 개념을 현실화시킨 기계 시계의 발명 등일 것이다. ‘수도원과 시계’에서 루이스 멈포드(L.Mumford)는 수도원에서 처음 발명돼 도시의 종탑에 설치된 기계식 시계가 산업혁명의 핵심 요소였다고 주장한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증기기관과 같은 물리력도 필요했지만, 인력 배치와 자재 수급을 동기화할 수 있는 시계가 더 중요했다는 것이다.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확보하게 된 엄청난 물리력도 결국 공간이동의 속도를 높이는 데 사용됐다. 이때부터 인력과 자재의 빠른 이동이 가능해지면서 사람의 행동반경이 넓어지고 의사소통도 더 원활해졌다. 그 결과 삶의 전반적인 리듬도 덩달아 빨라졌고, 생산성도 높아졌다.

 
 

  이제 우리는 ‘속도’라는 말을 물질뿐 아니라 데이터의 이동에서 사용한다.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된 이래 동력도, 데이터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공간이동을 한다. 사람이 문서 형태로 직접 들고 날라야 했던 정보가 허공을 지나 이동한다. 기계의 발명이 제품 제작 속도를 높인 것처럼, 컴퓨터의 발명으로 데이터 처리 속도도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이렇게 보면, 증기기관으로 시작된 1차 산업혁명, 전기로 대표되는 2차 산업혁명, 컴퓨터로 촉발된 3차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과거에 없던 속도에 대한 집착이 생겨나 점점 강화된 셈이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 정보통신기술(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ies, ICT)이 이끌 4차 산업혁명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어 한국에서 최초로 5세대 이동통신기술(이하 5G)의 상용화가 이뤄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5G 기술로 전송 속도가 빨라지면 그에 비해 가용하는 데이터양은 ‘순간적으로’ 충분치 않게 된다. 한스 요나스(H.Jonas)는 현대 기술사회에서 ‘수단과 목적이 변증법적으로 관계하며 서로를 부추긴다’고 했다. 많은 양의 데이터를 빨리 전송하기 위해 5G 기술이 개발됐고, 이에 걸맞은 많은 양의 데이터 이용 서비스가 만들어진다. 서비스의 증가는 다음 세대 기술을 필요로 하고, 곧이어 늘어난 데이터 저장기술도 필요로 할 것이다. 가능성과 필요가 엇갈리고 맞물리는 과정에서 무엇이 목적이고 수단인지, 왜 기술개발이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필요에 따라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아닌 개발한 기술의 필요를 만들어내는 것이 현대 기술의 특징이다.


모든 것의 연결

  초연결사회(Hyper Connected Society)는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결돼 있는 사회다. 본래 모든 기술은 그 작동을 통해 단절돼 있던 것들을 연결시키는 매개다. 그 연결은 다차원적이어서 물리적인 개체와 운동을 연결하기도 하지만 사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연결로 이어지기도 한다. 19세기 전후 전신(電信)에서 시작한 정보통신기술은 20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사물인터넷에 이르게 됐는데, 이로써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결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기술이 창조하는 연결을 견인하고 지탱하는 것은 물질과 정보가 이동하는 속도다. 수많은 개체들이 서로 유의미한 방식으로 연결돼 영향을 주고받기 위해서는 그 사이에 오가는 물질과 정보들이 빠른 속도로 움직여야 한다. 물질과 정보의 전달 속도가 느리다면 그 연결은 느슨해질 수밖에 없어 연결의 범위도 제한된다. 서울과 부산 간의 이동 시간이 10시간이던 과거와 2시간인 현재, 두 지역 간 연결의 강도와 범위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분야에서 전혀 다르다. 정보전달의 방식인 편지와 스마트폰을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이제 정보의 이동시간은 ‘0’에 수렴하고 있다. 5G는 초연결사회를 견인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자율 주행 자동차는 도로와 다른 차량, 주변 상황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작동하는데, 고속으로 주행하는 자율 주행 자동차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지연시간이 최소화된 5세대 이동통신이 적용돼야 한다. 이외에도 정보의 이동이 빨라져서 가능해지는 수많은 서비스들이 제공될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박자

  초연결사회의 속도는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기술철학자 랭던 위너(L.Wineer)가 말한 것처럼,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 삶의 형식이 된다. 초연결사회가 만들어내는 박자가 있고, 우리는 거기에 우리의 삶을 맞출 것을 요구받는다. 문제는 그 박자가 너무 빨라져서 이제 자연스러운 방식으로는 더 이상 초연결사회의 박자에 따를 수 없게 된 것이다. 산업혁명 이래 이미 충분히 빨라진 우리의 일상은 감당할 수 없는 정보기술의 속도로 다시 한 번 비약적인 변화를 강요받는다.

  이들 중 가장 심대한 변화는 사람이 기술의 속도 앞에 ‘수동적’이게 된다는 점이다. 이미 컴퓨터의 자동연산 능력은 인간을 능가했으나, 사람은 쏟아지는 정보들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다. 정보처리 속도에 적응하고 그것을 관리할 능력은 희소해진다. 자율 주행 자동차에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는 컴퓨터가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이 마주하는 모든 정보는 이제 일정한 가공을 거친 정보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나의 검색에 대한 결과조차도 나의 순수한 판단이 아니다. 수백만 개의 검색 결과 중 내가 선호할 만한 것을 고르는 것은 내 자신일 수 없다. 정보통신기술로 가능하게 된 속도는 너무 많은 유의미한 연결을 만들었고, 그 결과 연결들은 사실상 무의미하게 된다. 검색엔진만이 그것을 다시 유의미하게 만들어준다.

  이는 다시 권력관계의 문제로 이어진다. 빨라진 정보이동의 속도는 이동하는 정보의 양과도 비례하는데 그 정보는 어딘가에 저장·관리되고 분석돼야 한다. 엄청난 속도를 감당하고 제어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이므로, 이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거대 기업과 국가에 권력이 집중된다.

  초연결사회에서는 삶의 박자가 빨라지는 것이지 여유시간이 생기는 게 아니라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기술 발달로 ‘여가시간’이 생길 것이란 레토릭도 지난 한 세기 동안의 속도 전쟁 끝에 거짓으로 판명 났다. 짧아진 이동 시간, 자동화, 검색 시간의 단축 등 그 어느 것도 현대인의 여가를 늘리지 못했고, 노동의 강도와 경제적 양극화를 줄이지도 못했다. 빨라진 삶의 리듬이 모두에게 적용되면서 생겨난 경제적 이익과 물질적 풍요는 일부에게 집중된다.

  초연결사회로의 이동과 끝이 없는 속도의 추구는 불가분의 관계로 엮여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연결이 심화되면 가속이 필요하고 속도가 빨라지면 연결의 강도와 범위가 커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에 이러한 발전은 위험사회(Risk Society)의 취약성을 더욱 심화시킨다. 상호연결이 더 복잡할수록, 그 연결이 가지는 의미가 더 클수록, 물질과 정보의 이동속도가 빠를수록 그 전체구조는 더 취약해지고, 그 연결과 속도가 붕괴됐을 때 일어날 위험의 크기도 커진다.

 

 
 


천천히, 속도에 대해 묻기

  무조건적인 속도 추구의 정당성을 물어야 할 때가 됐다. 기술이 제공하는 사물과 정보의 움직임은 우리 삶의 속도를 정할뿐 아니라 인간의 인간됨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류의 문명을 지탱하고 인간의 본성을 정의하는 배경이 됐던 바와는 전혀 다른 방식과 속도로 물질과 정보가 움직이는 세상, 모든 것이 서로 연결돼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진지한 평가가 필요하다. 당장 그 흐름에서 이탈할 수는 없어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하다. 과학기술의 발전방향에 대한 민주적 통제일 수도 있고, 최근 주목을 받는 포스트휴먼·트랜스휴먼으로의 과감한 전환일 수도 있다. 그런데 속도에 대한 물음과 논의만큼은 속도의 강박에서 해방시켜야 할 터이니, 결론을 빨리 내려 서두르기보다 좀 천천히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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