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경 / 예술학과 박사과정

5분만 더 올라가면 정상이에요!

이혜경 / 예술학과 박사과정

  교정의 담이 노랗게 덮인 계절이다. 울타리를 따라 피어난 개나리꽃에, 숨죽이고 억눌렀던 기억들이 새어 나와 가슴을 시리게 한다. 이맘때, 담장을 샛노랗게 덮었던 개나리꽃 앞에 미소 띤 소녀가 햇살에 눈살을 찌푸리고 찍은 사진 한 장. 그 사진은 언제나 아픔을 간직한 채 가슴에 자리 잡고 있다. 노란 개나리의 꽃망울에 노란 리본이 뒤섞여 매듭지어진다. 꾹꾹 억눌린 아픔은 슬픔으로 망울을 터트려 결국 터져 나온다. 놀라다 못해 어이없는 대참사였으나, 사람들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그 상실을 실감할 수 없을 것이다.
  몇몇 지인들과 한라산 등반을 한 적이 있다. 세 시간 만에 도착한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하산하자는 일행과 홀로 헤어져 백록담까지 오르기로 마음먹었다. 감각이 무뎌진 발을 끌고 지루하게 펼쳐진 길을 하염없이 걷는다. 맞은편에서 하산하는 분의 “5분만 더 올라가면 정상이에요”하는 말에 용기를 얻어 한참을 다시 올라가는데, 이번엔 한 학생이 “정상까지 5분 남았어요”라고 한다. 그렇게 몇 번이고 5분이라는 거짓말을 들으며, 아니 의지하며 마침내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교하면 우습지만 히말라야를 오르는 산악인들의 마음이 이해되기도 했다. ‘세상은 정상까지 오르는 사람과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들로 나뉘는구나’라는 자존감까지 생겨난다. 하산하는 길, 나 또한 등반하는 사람들에게 “정상까지 5분 남았어요”를 앵무새처럼 나눠주며 10시간의 산행을 마치고 한라산을 내려왔다.
  상처로 인해 평생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처를 극복하고 그 전보다 더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 선택은 누구의 몫도 아니고 자기 자신의 몫이다. 가보지 않은 길은 불안하고 두렵지만, 그 길을 경험해보면 새로운 발자국들이 하나둘 쌓이기 마련이다. 상처 또한 아물어 ‘다시 삶’의 이유가 생기게 된다. 두려움을 떨쳐 본 경험은 자존감을 심어주고 삶에 용기를 불어 넣어 주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자율적인 존재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면서 말이다.
  나이 들어 공부한다고 하니 “그 나이에 왜 공부를 해?”하는 조소(嘲笑) 섞인 목소리를 간혹 들을 때가 있다. 이 질문은 ‘백록담까지 왜 올라가?’라는 질문과 같다. 물질화되는 세상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고 고유한 존재로서 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적인 삶을 위한 노력이다. 나는 배움의 과정을 통해 불안과 두려움은 경험의 부재에서 비롯되고, 경험으로 인해 그 두려움을 떨쳐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쩍쩍 갈라진 황무지 아래로도 봄비가 스미듯, 나도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개나리가 노랗게 피어나는 것을 외면하지 않게 될 것이고, 꽃이 지면서 고개를 내민 연둣빛 잎이 신록으로 짙어가는 5월을 따스하게 맞이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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