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진 / 약학대학 교수
[과학] 인간과 바이러스 ② 바이러스의 진단과 백신개발
인류와 바이러스는 오랜 세월 동안 밀고 밀리는 싸움을 지속해왔으나 신종 바이러스의 유행주기는 점점 짧아지며, 변이를 예측하기도 어려워지고 있다. 핵산과 단백질 껍질로 이뤄진 단순한 구조의 이 생명체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날만 기다리는 듯하다. 그렇다면 바이러스의 예고된 공격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이번 기획을 통해 현대 과학이 밝혀낸 바이러스의 특성을 알아보고 감염의 진단과 확산의 예방을 위해 어떠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지, 그 동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인류 역사와 바이러스 ② 바이러스의 진단과 백신개발 ③ 바이러스의 전염과 확산 예방 기술 ④ 인간과 바이러스의 공존
바이러스의 유전적 유연성과 백신의 진화
김홍진 / 약학대학 교수
필자가 바이러스를 연구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바이러스가 외부에서 유입된 병원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복제 메커니즘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숙주 세포 시스템을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바이러스의 하이재킹(Hijacking) 시스템은 ‘바이러스가 우리 세포의 일부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간의 연구들은 바이러스의 조상이 ‘퇴화돼 사라진 세포’ 또는 ‘아직까지 인류가 밝혀내지 못한 미지 영역의 세포’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을 지목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바이러스의 독특한 특징은 인류와 바이러스 간의 전쟁에서 험난한 과정을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감염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이 관점에서 우리는 바이러스가 숙주 세포의 존재 없이 증식 불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학계에서는 바이러스가 인체에 감염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숙주를 파괴하는 것이 아닌, 숙주 시스템과의 타협을 통해 다음 숙주로의 이동 기회를 확보하고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라는 점을 지목한다. 1976년 처음 등장했던 에볼라바이러스는 당시 치사율이 90%에 육박했지만, 근래에는 54%로 낮아졌다. 이러한 에볼라바이러스의 변화는 영역확장을 위해 숙주 시스템과 타협한 과정의 예로 볼 수 있다.
백신은 왜 필요한가
인류는 진화 과정에서 병원체를 잘 인식하기 위한 검열 시스템과 재감염 방지를 위한 면역 기억(Immune memory) 능력을 꾸준히 발전시켜 왔다. 바이러스 또한 이러한 면역 시스템의 진화에 대응해 면역계 교란 능력을 꾸준히 발전시켜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바이러스는 고정된 특성의 존재가 아닌, 환경과 숙주의 변화에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로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유연성을 대표하는 바이러스가 인플루엔자바이러스다. 인플루엔자바이러스는 복제과정 중에 유전자 오류를 교정하는 메커니즘이 결여돼 빈번하게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인플루엔자바이러스의 유전자 교정 능력의 결여는 생명체로서의 불완전성을 나타낸다기보다는 ‘증식 효율성’과 ‘종간 이동의 유연성’ 확보를 위해 바이러스 진화과정에서 획득된 전략으로 생각된다. 한편 인간의 유전자는 유전자 변이에 매우 보수적이기 때문에 면역체계의 대응이 바이러스의 유전적 유연성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러한 면역 체계의 빈틈을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백신이다.
백신의 효과는 변이를 잘 일으키지 않는 유전적 유연성이 낮은 바이러스에게 큰 힘을 발휘한다. 천연두바이러스가 유전적 유연성이 낮은 바이러스의 대표적인 예다. 한때 세계 사망 원인의 10%를 차지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던 천연두는 18세기 말에 개발된 천연두 백신의 보급으로 1977년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한편 인플루엔자바이러스의 변이 속도는 천연두바이러스에 비해 1만 배 이상 빠르다. 1918년에 발생한 스페인 독감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1억 명 정도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는 바이러스가 종간 이동을 통해 대변이를 겪으면서 그 특성이 기존 바이러스와 큰 차이를 나타내게 된 경우다. 이 경우 우리 면역계에 축적된 기존 인플루엔자바이러스에 대한 면역 기억은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다행히도 인플루엔자바이러스는 인류에게 백신 개발의 여지를 남겨 줬다.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 개발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1차적으로 체외에서의 세포배양을 통한 바이러스 생산이 가능해야한다. 이렇게 생산된 바이러스는 불활화(Inactivated) 과정을 거쳐 병원성을 제거한 후 백신으로 사용될 수 있다. 전통적인 백신 생산방식은 원(原) 바이러스 그 자체를 백신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백신은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포함하기 때문에 부작용에 대한 위험을 증가시키고, 체외에서 증식이 가능하지 않은 바이러스의 경우 백신 개발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을 가진다. 근래 유전자 재조합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세포 배양을 통해 증식이 불가능했던 바이러스의 경우에도 백신 제조가 가능하게 돼 바이러스 예방의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바이러스 백신 진화의 결정체, ‘바이러스 유사입자’ 백신
유전자 재조합 기술을 통해 탄생하게 된 백신의 대표적인 예가 아단위(Subunit) 백신과 바이러스 유사입자(Virus-Like Particles, VLP) 백신이다. 아단위 백신과 바이러스 유사입자 백신은 면역 기억 구축에 필요한 바이러스 외부 단백질 부위만으로 구성돼 있어 기존 불활화 백신보다 안전성 면에서 우수하다. 특히 바이러스 유사입자 백신의 경우 바이러스 모양을 모방한 형태다. 바이러스 유사입자는 인류가 창조한 가장 복잡하고 정교한 단백질 구조체라 볼 수 있다. 또한 바이러스 유사입자 백신은 실제 바이러스가 감염됐을 때 발현되는 복잡한 면역 메커니즘을 작동시킬 수 있어 차세대 백신 형태로 주목받고 있다. 현재까지 개발된 바이러스 유사입자 백신에는 인유두종바이러스(Human Papilloma Virus, HPV) 백신과 B형간염바이러스(Hepatitis B Virus, HBV) 백신이 있다. 근래 다양한 종류의 백신이 바이러스 유사입자 형태로 개발되고 있어 미래 바이러스 예방 범위는 대폭 확장 될 것으로 기대된다.
백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
바이러스는 유전적으로 다양하고 잦은 변이를 일으킨다. 따라서 바이러스 유형 변화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뒷받침돼야 우수한 형태의 백신 개발이 가능하다. 독감 백신의 경우 WHO에서 올해 유행하게 될 유형의 인플루엔자바이러스를 예측하고, 이에 따라 제약사가 해당 유형의 바이러스를 포함하는 백신을 생산·공급하는 방식을 따른다. 그러나 현재 예측 방식의 정확도는 아직까지 부족한 실정이며, 실제 유행하는 바이러스 유형과 백신에 포함된 바이러스 유형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백신의 효과가 떨어진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수한 형태의 백신 개발을 위해서는 보다 신속 정확하게 바이러스 유형을 검출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 개발된 차세대시퀀싱 기술은 많은 양의 유전자를 신속하게 분석할 수 있는 기술을 제공해 향후 바이러스 백신 개발에 희망을 더해준다. 인류의 바이러스 질환 정복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과 기술의 발전이 우수한 형태의 바이러스 예방 백신 개발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