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19.6.5 수 03:04
기획사회
[사회] 속도, 자본 흐름의 핵심류동민 /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최은영 편집위원  |  rio.flaneu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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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호]
승인 2019.04.02  14: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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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를 사유하기 ② 맑스주의와 속도]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스스로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한다. 이에 대항하는 일련의 사유방식이 있다 하더라도, 생존을 위해 시간을 관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어렵다. 이는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한 본능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본질적으로 우리를 냉엄한 시간 관리로 이끄는가. 그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맑스주의를 바탕으로 현대사회의 시간과 속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속도의 철학자, 폴 비릴리오 ② 맑스주의와 속도 ③ 초연결사회와 속도 ④ 속도에 저항하기

속도, 자본 흐름의 핵심

류동민 /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상품은 가격을 갖는다. 그 가격의 본질을 인간의 노동에서 찾는 이론이 ‘노동가치론’이다. 요컨대 최신형 스마트폰의 가격이 짜장면 가격의 200배쯤 되는 이유는 그 안에 포함된 인간노동의 양이 200배쯤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마르크스가 말한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추상적 노동의 대립항은 구체적 노동이다. 모든 개별성에 담긴 구체적인 것의 흔적을 지워버릴 때 비로소 추상적인 것이 탄생한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것의 구체적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 추상의 논리는 폭력성을 그 본질로 삼는다. 개별 수험생의 경제적·문화적 배경을 지운 채 표시되는 하나의 숫자, 예컨대 수능이나 토익점수를 생각해보라.

  노동의 추상화는 화폐를 통해 완성된다. 생산된 상품이 시장에서 팔릴 때 비로소 노동시간은 화폐로 바뀐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실업자의 남아도는 시간은 화폐로 바뀌지 않는 반면, 화폐는 타인의 노동시간을 살 수 있도록 해준다. 요컨대 노동시간에서 화폐로 가는 길은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목숨을 건 도약’이라 표현될 만큼 험난하지만, 화폐에서 노동시간으로 가는 길은 극심한 인플레이션 같은 비정상적 상황을 제외하면 항상 활짝 열려 있다.


속도경쟁의 내면화

  자본주의사회가 ‘자본’주의인 것은 바로 그 주체가 자본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존재이유는 투자한 돈에 비해 더 많은 돈, 즉 이윤을 얻는 데 있다. 경쟁상대보다 더 적은 노동량으로 더 많은 상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자본은 존립할 수 있는 것이다.

  경제학 교과서가 금과옥조로 삼는 ‘최적화’의 논리는 자본의 행동을 설명할 때 가장 잘 들어맞는다. 최적화는 죽기 아니면 살기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혼자 힘으로 구조를 바꿀 수 없는 개인은 그 주어진 구조 하에서 최적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개인마저도 궁극적으로는 자본의 논리를 내면화하게 된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이른바 신자유주의다. 주체들이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논리를 내면화할 때 속도를 높이려는 노력이 시작된다.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1936)에서 컨베이어벨트의 속도를 올리라고 명령하는 것은 자본이며, 주인공 찰리는 영문도 모른 채 그저 빨라진 속도에 몸을 맞출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던 타임즈(현대)에서 속도를 올리는 것은 우리들 자신인 셈이다.

 

   
 

 

  만물을 상품화하고 그 상품의 가치가 그것을 생산하는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될 때, 자본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생산에 필요한 시간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각 시간을 압축적으로, 즉 노동강도를 높일 것이 요구된다. 더 짧은 시간에 더 압축적으로 일하는 것, 바로 속도를 올리는 것이다. 프레데릭 테일러(F.Taylor)의 시간연구와 동작연구를 거쳐 도요타 공장의 악명 높은(혹은 일본적 생산방식의 효율성으로 칭송받았던) 68초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속도의 원리는 관철된다. 도요타 공장에서는 자동차 한 대 당 조립시간을 68초에 맞춰 생산라인을 가동했다. 그런데 이 68초는 노동자의 작업리듬을 고려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자동차의 시장수요로부터 역산된 것이었다. 포스트모더니티의 특징인 ‘시공간압축’은 그러므로 자본의 논리 안에 이미 담겨 있다.


시간의 재구성

  화폐와의 교환을 통해 추상적으로 된 노동시간을 최소화하려는 자본의 노력은 이내 시간 개념 그 자체를 자본이 재구성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노동시간은 모든 구성요소가 동질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마치 똑같은 모양의 레고 블럭처럼, 각각의 초·분·시간은 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어진다. 시간의 가분성이 성립한다. 여덟 시간을 지속하는 노동과 네 시간씩 쪼개어 두 번 하는 노동은 동질적인 것이 된다.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간에 인간의 노동은 언제나 일정 시간당 동일한 생산성을 갖는 것으로 간주된다. 1시간의 데이트는 15분짜리 데이트 네 개와 결코 같지 않다. 데이트 시간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경험으로만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이 재구성한 시간 개념에서는 양자 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시간의 가분성은 다시 시간의 가역성으로 발전된다. 타임슬립이라는 공상과학영화의 클리셰는 자본주의적 노동 현실에 대한 완벽한 은유가 된다. 일정한 기간 동안에 측정되는 경제변수를 플로우(Flow)라 부르고, 플로우가 누적돼 어느 시점에서 측정되는 경제변수는 스톡(Stock)이라 한다. 매달 받는 월급은 플로우이고, 그 일부를 저축해 쌓인 재산은 스톡이다. 플로우에 대해서는 플로우로 보상한다는 원칙, 즉 모든 노동은 단위 시간당 지출된 양에 비례해 보상받는다는 원칙은 이로부터 도출된다.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원칙은 글자 그대로는 맞는 것이지만, 어떤 맥락에 놓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미래에 존재하는 자산을 현재에 사고파는 선물거래, 미래의 소득을 시간 할인이라는 계산방식을 통해 현재의 소득으로 전환하는 방식은 시간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기에 이른다.


노동력의 흐름에서 자본의 흐름으로

  자본을 끊임없는 자기증식운동으로 파악한 마르크스에게 있어 자본의 순환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다. 화폐(돈)로 시작한 자본은 노동력과 생산수단이라는 상품의 형태로 바뀌어 생산과정에 투입되고 그 결과로 새로운 상품을 생산하며 그 상품이 시장에서 판매됨으로써 이윤이 덧붙여지는 것이다. 즉, 화폐자본에서 생산자본, 상품자본을 거쳐 다시 화폐자본으로 모양을 바꾸는 것이 자본의 순환이다.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인 데이비드 하비(D.Harvey)는 ‘연속성, 유동성, 그리고 속도가 자본 흐름의 핵심 성질’이라 강조한다. 경제지리학의 관점에서 이러한 핵심 성질의 발휘에 가장 큰 장해물이 되는 것은 건물이나 주택 등의 고정된 형태로 자본이 묶여 버리는 것일 테고, 이를 돌파하기 위한 자본의 끊임없는 노력이 우리가 사는 공간의 모습을 규정한다. 건축과 재건축을 되풀이하는 건설 자본의 행태를 생각해 보면 알기 쉽다.

  노동력의 흐름은 개별 노동자의 관점에서는 그날그날의 삶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력이 자본의 구성요소로 편입됨으로써 노동력의 흐름은 자본의 흐름에 종속된다. 노동력 양성에 대한 투자(대표적으로 교육)는 적정수익률을 충족하지 못하면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게 된다. 최소 비용 및 시간을 투자함으로써 최대 수익을 얻어야 한다는 원리가 노동력에도 적용되기에 이른다.

 

 

   
 


시간의 불평등배분

  인공지능이니 4차 산업혁명이니 하는 기술진보가 극히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이라면, 가까운 미래에 사회 전체적으로 필요한 노동의 양이 임계수준 아래로 떨어짐으로써 인구의 상당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회적 노동시간의 최소화는 자본의 시간 최소화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 자본은 ‘더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노동시간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설사 두 가지가 우연에 의해 같아진다 하더라도 시간을 절약해 얻는 편익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골고루 배분되지는 않는다. ‘당일배송’의 편익을 누리는 소비자의 가처분시간은 심야에 난폭운전을 불사해야 하는 택배노동자의 가처분시간으로부터 이전된 것이지만, 그 이전의 과정에 얽혀 있는(따라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논리는 간단하지 않다. 속도를 높임으로써 이윤을 만들어낼 여지가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자본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기술진보에 따른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감소가 곧바로 ‘노동해방’으로 이어지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다. 노동 여부와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본소득은 아마도 노동시간에서 화폐로 가는 길의 험난함을 덜어줌으로써 시간주권의 회복에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주권을 되찾는 것은 시간의 불평등한 배분을 완화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으며, 시간배분의 불평등은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구조를 평평하게 만들 때에야 비로소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자본흐름의 핵심인 속도, 그것을 둘러싼 경쟁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까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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