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으로 시대 읽기]

흑백의 기억과 붉은 잔상

  알렉시예비치(S.Alexievich)의 저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1985)에서 전직 군인은 전쟁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그 4년 동안 꽃이고 새고 전혀 본 기억이 없어. 당연히 꽃도 피고 새도 울었을 텐데…전쟁은 모든 게 검은색이야. 오로지 피만 다를 뿐, 피만 붉은색이지”.
  감독 오멸은 “제주도를 아름다운 색을 지닌 곳으로 기억하지만, 다채로운 화려함 이면에는 4·3사건과 같은 아픔이 있다. 그 아픔을 얘기하는데 색을 빼는 게 좋겠다고 판단”해 작품을 흑백으로 표현했다. 여기서도 사실 붉은색의 표현이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의 망령과도 같은 존재이자 광기에 취한 군인이 외치는 토벌의 대상, ‘빨갱이’라는 표현이다.
  참상의 기억을 영화로 표현한 감독과 당시를 떠올리는 군인의 발화에서 공통적으로 ‘흑백’이라는 ‘채도가 결핍된 정서’가 드러나는 것에 우리 모두는 고개를 끄덕인다. 또한 각기 다른 의미로 표현되는 ‘붉은색’의 존재는 흘려진 수많은 피의 잔상처럼 시야와 사고를 어지럽힌다. 그러나 어둠과 붉음만을 남기고 색의 감각을 앗아간 유무형의 당사자는 상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시대에 휩쓸려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이것은 과연 누구에 대한, 누구를 위한 싸움이었을까. 이 싸움으로 자신의 필요를 충족한 그 누군가는 이들로부터 거둬 간 빛과 색으로 찬란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보람 편집위원 | boram2009@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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