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19.6.5 수 03:04
기획학술
[학술] 구술사, 민주적이지도 민중적이지도 않은 역사 쓰기정혜경 /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
정보람 편집위원  |  boram2009@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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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호]
승인 2019.04.02  12: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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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구술, 하나의 학문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② History에서 Herstory로, 여성의 이야기를 기록하다

구술사는 민중의 체험과 기억을 역사 담론의 장으로 끌어낸다는 점에서 민주적 기능을 한다. 국내에서는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한 사회운동으로부터 촉발된 구술사 연구가 소외된 여성사와 민주화 운동의 기록 및 근현대 예술사의 공백을 메우는 중요한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 구술사의 역사와 현재를 되돌아보고, 그 성과와 나아갈 방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한국구술사의 전개 과정 ② History에서 Herstory로, 여성의 이야기를 기록하다 ③ 기억의 역사를 기록의 역사로 ④ 근현대 예술사의 공백을 메우다

 

구술사, 민주적이지도 민중적이지도 않은 역사 쓰기

정혜경 /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

  경험은 구술기록수집(In-depth-interview) 과정을 거쳐 기록되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글쓰기를 통해 역사가 된다. 즉 구술사(口述史)다. 초기 서구 구술사가들의 ‘역사의 민주화’ ‘민중의 역사’라는 도발적 기대와는 달리, 현재 구술사 학계는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구술사’에 주목하는 단계가 됐다. 그럴 리가, 구술사가 민중의 역사쓰기가 아니라니.
  20세기 초 구술사가 사학계로 돌아온 후 주류는 민중사였다. 톰슨(E.Thomson)의 《영국노동계급의 형성》(1963)이나 피에르 부르디외(P.Bourdieu) 등 22명의 프랑스 사회학자들이 3년 동안 인터뷰한 《세계의 비참》(1993)은 민중사의 걸작으로 알려졌다. 동양에서도 일본 노동사, 인도 서브얼턴(Subaltern) 등 하층사회가 관심의 대상이었고, 한국도 민중자서전 시리즈에서 출발해 《한국민중구술열전》으로 이어갔다.
  그럼에도 구술사가 ‘민주적이지도 민중적이지도 않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구술자가 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중의 역사’라는 언설은 민중을 구술자로 선택한 기획자나 면담자 입장이다. 기획부터 활용까지 모든 과정에서 구술자가 주인공이 되는 단계는 인터뷰에 국한된다. ‘민중 스스로 역사적 글쓰기의 주체’가 아니라 ‘민중을 구술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표현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또한 ‘차마 이야기할 수 없는 경험’과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발화하는 과정에서 남은 상처는 고스란히 구술자의 몫이다. 민중이나 민주와 거리가 있지 않은가.

여성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

  문자가 없었던 시기에도 인간은 전승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기록보존자(Remembrancer)가 존재했다. 기록보존자는 구전을 통해 수천 년간에 걸친 역사를 남겼으며, 사가(史家)의 역할을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 주류 역사기록은 남성 입장에서 남성의 경험을 기록해왔다. 여성은 오랫동안 역사의 소수자였다. 19세기 이전 구술사 전성 시기에도, 랑케 근대 사학 시기에도 변함없었다. 20세기 들어 구술사는 아카데미 역사학으로 돌아왔다. 매체·기기의 발전, 인류학과 민속학 등 관련 학문의 성장, 각국 사회 통합의 필요성, 역사학자들의 인식 전환이 가져온 결과였다.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녹음장비는 제국주의의 확산 속에서 구술사의 복귀를 가져온 일등 공신이었다.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사회통합의 필요성에 따라 시민을 대상으로 인터뷰 프로젝트를 벌인 국가들이 늘었다. 구술 대상에 여성을 포함했으나 여성 중심의 역사쓰기는 아니었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후반 ‘허스토리(Herstory)’ 등장 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국내 여성 중심의 구술사도 피해자와 약자에서 시작했다. 1990년대부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야기, 한국전쟁 시기 여성의 경험(윤택림), 울산 현대자동차 가족이야기(조주은), 전쟁과 여성(김현아), 내 어머니 이야기(김은성), 70년 전 사할린에 징용 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들의 구술(정혜경) 등 여성을 주제로 한 구술기록 수집 작업이 꾸준히 이어져 왔으며, 주제도 피해 기록을 넘어 일상의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우리는 왜 여성들의 경험을 들어야 하는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S.Alexievich)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1985)는 ‘목소리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유명하다. 벨라루스 출신으로 일상 속에 전쟁이 스며든 삶을 살아온 작가는 소련 전역을 돌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소녀들을 대상으로 수 년 간에 걸쳐 구술을 채록했다. 작가의 표현대로 ‘여자들은 전쟁을 이야기하면서 남자 사회에 말을 걸었다’. 러시아어에서 군대 용어는 대부분 남성명사로, 전쟁은 오로지 남성의 역할임을 표명한다. 하지만 당시의 소녀들은 위생사관·저격수·기관총 사수·고사포 지휘관·공병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고, 작가에게 각자의 경험을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작가가 만난 구술자 가운데 다수는 자기통제의 내면화를 겪은 이들이었다. 전시에 자율성이 통제됐고 전통적인 성별 분업이 강조된 전후 소련의 상황, 결혼과 취직의 걸림돌이 된 참전의 경험이 이들의 회상과 발화를 막아섰다. 더구나 회상은 기억의 재현이라기보다는 경험에 의한 새로운 탄생이다. 구술자들은 현재로부터 과거를 바라봤다. 작가는 전쟁의 사실이 아닌, 전쟁의 일상과 감정을 전하고자 했다. 남자들이 일으키고 여자들이 희생되는 전쟁의 폭력성에 경종을 울리며, 남자들이 전쟁의 역사를 승리의 역사로 몰래 바꿔치기하고 승리를 여자들과 나누지 않은 점을 지적하고자 했다. 작가의 인터뷰는 바로 도스토옙스키가 던진 물음인, 삶과 죽음에 대한 진실을 추구하는 작업이었다. 이는 또한 지워져 온 전쟁사 연구의 사료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호소이 와키조가 비참한 환경의 여공들을 인터뷰한 르포집 《여공애사(女工哀史)》(1925)를 낸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하루 12시간 이상 서서 일하는 가혹한 노동과 숨 막히는 작업장, 다다미 한 장 크기의 방, 터무니없는 식사 등 당시의 열악한 노동환경이 여공의 목소리를 통해 드러났다. 이 폭로는 일본 자본주의의 맹점과 인간성의 문제를 고발하려는 시도로, 당시 일본 사회에 충격을 줬으며 지금까지 일본 노동사의 중요 사료로 다뤄지고 있다.
  여성의 경험을 구술을 통해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은 여성학의 범주를 넘어,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하는 계기이자 마중물이다. 또한 권력과 폭력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금석(試金石)이다.

증거적 가치? 약탈적 구술을 낳다

  약탈적 구술. 면담자 교육 프로그램에서 필자가 한 말이다. “인터뷰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다. 구술자는 마시고 버리는 캔이 아니다. 구술자의 입장을 간과한 인터뷰는 약탈적 구술”이라는 내용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수강생들이 있었다. 이는 구술사를 ‘증거적 가치’로 보는데 중점을 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술사는 증거적 가치와 무관한가. 인간의 경험은 발화를 통해 그대로 재현될 수 없다. 사회적 의미 부여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구술사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Fact)’이 아니다. 구술사연구방법론도 구술자의 발화내용을 통해 사실을 확인하고, 문헌자료와 비교하는 연구가 아니다. 발화자의 ‘발화 배경·의도’를 찾아가는 연구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가’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구술기록을 통해 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가. 증거적 가치가 없는 사료가 의미가 있는가. 사료란 역사연구와 역사학적 글쓰기를 위한 자료다. History의 어원은 라틴어 Historea이고, 의미는 ‘Hi(쓰다)+Storea(이야기)=이야기를 쓰다’이다. 이야기를 쓰기 위해 역사학자들은 동일한 주제에 대한 다른 관점을 분석하고 다양한 사료를 교차 분석함으로써 주관적 객관성을 추구한다. 문헌기록과 비문헌기록(구술, 사진, 영상 등)은 사료의 매체별 종류일 뿐이다. 매체나 형태가 어떠하든 기록은 생산 당시부터 정치적 이념적 편향, 기록자의 주관, 과장 및 은폐가 내재돼 있다.
  <오키나와의 할머니>(1979)는 최초의 위안부 피해 증언을 한 인물로 알려진 배봉기 할머니의 인터뷰를 담은 야마타니 데쓰오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다. 모집인의 말에 속아 1943년부터 군위안부의 생활을 한 배봉기 할머니는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에 재귀속되는 상황에서, 체류허가를 얻기 위한 조사를 받는 과정 중 피해 사실을 밝혔다. 대부분의 연구자는 이 영화에서 군위안부의 실태와 1970년대 말 당시 한국 남성의 군위안부 인식에 집중했으나 필자의 관심은 구술자에 대한 면담자의 태도였다. 감독에게 할머니는 ‘궁금한 사실을 전해주는 역사적 아픔을 가진’ ‘증거적 가치를 가진 존재’만이 아니었다. 감독은 할머니에게 일본군 위안부로서 생생한 ‘증언’을 원하지 않았다. 실제로 영화에서 처참한 군위안부의 실태를 말하는 비중은 적다. 다만 영화의 처음에 할머니는 감독과의 만남 자체를 거부했으나, 끝 부분에서는 두 사람이 시장을 보고 집에서 편안하게 저녁 식사를 하는 모습이 나왔다. 이러한 과정은 구술사가 무엇인지, 우리가 왜 구술기록을 수집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목적과 이유를 다시금 되새기게 했다. 한국의 구술사가들이, 구술기록을 수집하려는 많은 연구자들이 이 점을 공유한다면, 더 이상 약탈적 구술이라는 용어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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