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 / (前)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

[예술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 - ② 영화: 제주4.3과 영화 ‘지슬’]

어떤 예술작품은 사회적 맥락과 역사 속에서 바라봤을 때 무게를 다르게 지니는 경우가 있다. 역으로, 역사적 사건이 창작자에 의해 또 다른 매체로 다시 표현될 때 사람들은 사건을 감동적인 이야기로 내면화해 새롭게 기억하기도 한다. 굴곡 깊은 한국 근현대사를 작가의 시각으로 오롯이 담아낸 작품들에 대해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덧붙인 이야기를 집중 조명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회화: 군사정권과 신학철의 ‘모내기’ ② 영화: 제주4.3과 영화 ‘지슬’ ③ 문학: 5.18과 소설 ‘소년이 온다’ ④ 사진: 비틀어진 근현대사와 노순택의 ‘비상국가’

 

■지슬 스틸컷
■지슬 스틸컷

필름으로 빚어 영화로 올리는 제사

박경훈 / (前)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

  오멸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지슬>(2012)을 촬영했던 경험에 대해 “제주 4·3사건 당시 돌아가신 분들의 제사를 지낸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찍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에게 있어 ‘지슬’은 필름으로 빚어, 영화로 올리는 제사였던 것이다. 그의 말처럼 영화는 ‘신위(神位, 영혼을 불러 앉히기 위해 위패를 모심)’ ‘신묘(神廟, 영혼을 모시는 굿)’ ‘음복(飮福, 제사 음식을 나눠 먹는 것)’ ‘소지(燒紙, 지방지를 태우는 것)’라는 네 개의 시퀀스로 이뤄진다. 영화 자체를 제순에 따라 진행한 셈이다. 기실 이러한 작품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그만의 것은 아니다. 제주 지역에서 4·3작품을 매년 발표하는 작가들 대부분은 이러한 제의적 태도 위에서 창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평론가 성완경은 제주 4·3미술제 심포지엄에서 20년 동안 이어진 미술제에 대한 촌평으로, “역사적인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이리도 다양한 사람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창작을 이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하지만 흥미로운 미술사적 사례”라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제주도의 여느 미술가들은 매년 4월이면 어김없이 열리는 4·3미술제에 각자 한 작품씩을 헌납하는 셈인데, 이는 제주도민들의 전통적인 제사 방식과 닮았다. 제주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이면 저마다 마을의 수호신에게 올리는 당제(堂祭)가 열리는데, 이때 각 가정마다 한 차롱(작은 광주리)씩의 제물을 가지고 와서 당신(堂神)에게 바친다. 이처럼 예술가들은 4·3에 대해 미술제라는 형식으로 매년 제사를 올려 온 셈이다.

■지슬 스틸컷
■지슬 스틸컷

  영화가 시작되면, 먼지가 내려앉은 민가의 마루 위에 어지럽게 흩어진 제기(祭器)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 장면은 사실 이 영화가 ‘제사’로 만들어져야 하는 모든 상황을 웅변하는 시퀀스이기도 하다. 감독에게는 제사 불가능의 상황이 역사로서의 4·3이다. 주민들에게 조상의 명복을 기리는 제사는 매년 연례행사로 치러지는 일상적인 생활문화 중에서도 중요한 문화적 이벤트다. 그런 중대사가 4·3이라는 미증유(未曾有)의 대학살로 인해 이뤄지지 못하는 상황, 제사의 가장 중요한 소품인 제기들이 마루에 내팽개쳐져 나뒹구는 상황이 바로 4·3인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를 올리는 마음으로 이 영화를 만든 감독에게 이 상황은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며, 영화를 통한 제주공동체의 복원 및 정상화를 위한 바람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가 만난 4·3의 진실

  영화는 4·3사건의 정치적 발단 시점이 아닌, 실질적 민간피해가 극에 달했던 1948년 겨울을 바라본다. 그해 겨울은 본격적으로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이 시작된 시점이다. 실제 역사에서 소위 미증유의 민간인 학살을 몰고 왔던 ‘4·3 초토화 작전’은 1948년 10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제주도 서북부 지역의 안덕면 동광리에도 그 시기 토벌대가 들이닥친다. 이들은 마을 주민들을 모아 놓고 그 자리에서 10여 명을 학살한 후 동광리 내 마을 5곳 중 한 곳인 간장리를 불태웠다. 그리고 사흘 뒤에는 모든 마을을 흔적도 없이 불태워 버렸다. 토벌대의 추적과 추위를 피해 흩어졌던 동광리 주변의 무동이왓, 삼밭마을 주민들 120여 명은 속칭 ‘큰넓궤’로 알려진 동굴로 숨어든다. ‘큰넓궤’는 제주말로, 말 그대로 동굴 내부는 크고 넓지만, 입구는 여간해선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 동굴이었기에 주민들이 은신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그렇게 피신했던 주민들은 발각되기 전까지 근 두 달여를 이곳에서 버틸 수 있었다.
  영화는 사실적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소위 사건을 그대로 재구성하는 리얼리즘 영화는 아니다. 그렇다고 팩션(Faction)적이지도 않다. 다만, 감독은 흑백사진 또는 수묵화가 지닌 단색 톤으로 사건 전체를 감싸 안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영화 언어를 구사한다. 동굴로 피신했던 상황과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육지로부터 파견된 토벌대의 내·외부를, 카메라는 마치 영상시를 읊듯 시종 훑어간다. 감독의 카메라는 “영화 한 편으로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다”는 그의 인터뷰에 잘 나타나 있듯이, 동광리 큰넓궤라는 공간과 토벌대가 초토화 작전의 광기로 물들였던 대토벌기라는 시간대 위에서 마치 콜라주 작업처럼 좁혀진 시공간의 환경을 구성해 4·3사건에 대한 그만의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토벌대는 군대라는 하나의 조직이고 주민들은 다양한 개체들의 합이지만, 감독은 집단으로만 읽히는 군대를 그 안에 다양하게 포진해 있는 군상들을 포착함으로써 해체한다. 즉, 잔악한 토벌대 내부에도 결국 인간이 있음을 발견하고자 했고, 그들의 상황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그동안의 다양한 증언들에서도 드러나듯 주민들은 하나같이 개체화된 상황과 기억으로 4·3이 각인돼 있지만, 동일한 시간대·동일한 공간에서 하나의 집합체로, 즉 ‘희생자 집단화’ 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특히 동굴 속 블랙아웃된 전체 화면의 구석구석에서 말소리의 원근감에 따라 움직이며 점차 커져 가는 화면의 연출은 피해자로 집단화한 주민들의 상황을 은유한다. 주민들 각각의 사정과 이야기들은 웅웅거리는 ‘소리’가 되고, 주민들의 무리 지은 모습과 합쳐지면서 감독이 표현하고자 했던 ‘집단으로서의 주민들’의 영상화에 성공한다.

 

■지슬 스틸컷
■지슬 스틸컷

4·3의 본질, 눈물의 상징화

  감독이 밝히고자 했던 4·3의 본질은 영화의 끝 무렵, 고추를 태운 매운 연무가 자욱한 동굴 속에서 학살당하지 않으려는 주민들과 토벌하려는 군인들의 대치 장면에서 흘리는 ‘눈물’로 표출된다. 눈물은 토벌대와 주민 모두의 눈에서 쏟아진다. 그 눈물이 매운 고추연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인지, 처참하게 동족을 학살해야 하는 아귀(餓鬼) 같은 운명과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주민들의 기구한 운명의 눈물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관객들은 그 눈물이 이 영화의 궁극의 답인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오멸의 <지슬>은 과거의 4·3을 그리지만 현재에 대해 묻는 듯하다. “4·3이 뭐야?” 그리고 그는 매운 연기 속 두 집단의 눈물을 상징화해 답을 냈다.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온 4·3작품들에선 없던 답이다. 오멸의 작품이 나오기 전까지 그동안의 4·3작품들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 “4·3은 이런 것입니다” 혹은 “그 때 이랬습니다”는 등 사실의 충격성, 경험하지 못한 자들이 알아야 할 진상의 복원과 진실의 기록이라는 측면에 매진해온 것이 태반이었다. 그에 반해, 영화 <지슬>은 과감하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그만의 질문과 답을 낸 것이기에 새롭다. 그러기에 기존 4·3작품들과는 다른 예술적 성취를 이룬다. 

■지슬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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