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택림 / 한국구술사연구소 소장

[구술, 비주류의 역사 기록이 하나의 학문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구술사는 개인이 기억하는 과거 사건에 대한 해석을 육성구술을 통해 채록하는 사료수집 방법이다. 나아가 구술기록을 토대로 하는 역사학 방법론을 의미하기도 한다. 구술사는 역사연구의 주체를 소수의 전문가에서 다수의 비전문 대중, 특히 스스로 기록을 남기기 어려운 민중의 체험과 기억을 역사 담론의 장으로 끌어낸다는 점에서 민주적 기능을 한다. 국내에서는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한 사회운동으로부터 촉발된 구술사 연구가 소외된 여성사와 민주화 운동의 기록 및 근현대 예술사의 공백을 메우는 중요한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 구술사의 역사와 현재를 되돌아보고 그 성과와 나아갈 방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한국구술사의 전개 과정 ② History에서 Herstory로, 여성의 이야기를 기록하다
③ 기억의 역사를 기록의 역사로 ④ 근현대 예술사의 공백을 메우다

 

주변의 역사, 구술사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윤택림 / 한국구술사연구소 소장

  한국에서 구술사는 학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사회·정치적 운동으로 시작했다. 1980년대 말부터 민주화 바람이 불자 근현대사의 공식적인 역사에서 가려졌던 사람들과 사건들이 구술을 통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민사회에서 민중에 대한 관심과 억압되고 가려진 과거 사건에 대한 규명의 필요성에 의해 구술 자료 수집과 조사가 이뤄졌던 것이다. 역사학계에서도 현대사에 대한 관심으로 구술 증언을 수집하기 시작했지만, 학문적으로 구술사가 연구된 것은 아니었다.

민주화의 역사와 함께 성장하는 한국구술사

  1990년대는 인류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의 주도로 구술사가 학문으로 성장한 시기였다. 사회적으로는 문민정부 출현과 민주화의 진전으로 과거사 진상 규명 차원에서 시민단체가 진행했던 구술 증언 조사가 좀 더 체계화됐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인류학자들이 서양의 구술사 연구를 국내에 소개하면서 현지조사에 기초한 구술사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했고, 일부 사회학자들도 구술사 연구에 동참했다. 인류학자들은 구술사 사례 연구뿐만 아니라 구술사와 생애사에 대한 이론적·방법론적 논의들을 소개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 구술사는 기관의 구술채록 사업 증가로 인해 양적으로 크게 도약했다. 2004년 국사편찬위원회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구술채록사업을 시작했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연구재단 등 정부 관련 연구 기관들에서 기초학문 육성을 위해 구술사 연구방법을 활용하는 연구 프로젝트들을 지원하게 됐다. 또 과거사 진상 규명을 위해 정부가 지원하는 각종 위원회들이 활동하면서 문헌기록이 없는 사건들의 진실 규명을 위해 구술 증언 조사를 수행했다. 권위주의적인 정치체제 내에서 드러날 수 없었던 개인적 경험과 기억들이, 한국사회의 더 나은 민주화와 역사적 진실의 규명을 위한 귀중한 자료로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개인적 경험과 기억들은 지배층이 전유하는 기록에선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구술로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한국구술사연구의 새로운 지평

  이러한 상황에서 구술사 연구 프로젝트가 늘어나고 각기 다른 주제 분야에서 구술사 인터뷰를 하는 연구자들도 늘어갔다. 그러나 구술사 학과, 교수, 학생도 없는 상태에서 구술사 연구에 대한 전문성이 더욱 요청되면서 학회의 성립이 필요했다. 2009년 초 인류학·역사학·사회학에서 구술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한국구술사학회 창립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구술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며”라는 주제로 한국구술사학회 창립대회가 개최됐고, 한국 최초의 구술사 전문 학회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구술사 연구를 하고 있는 연구자들을 위한 학문적 논의와 소통의 장을 열었다. 2010년에는 구술채록사업을 하는 기관들의 협의체인 ‘한국구술사네트워크’가 설립됐다. 이러한 과정에서 구술사 연구자들과 유관 연구기관들이 한자리에 모여 구술사 연구의 발전 과정에서 가장 절박한 문제였던 윤리적 문제들을 논의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구술사 연구 윤리 원칙’이 제정됐다. 학회는 이어 국내 최초 구술사 전문 학술지 <구술사연구> 창간호를 발간했다.

학문적 경계를 넘나드는 구술사의 주제들

  <구술사연구>는 2010년 창간호를 발행한 이후 신생·소외 학문 분야로서 미등재후보 학술지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매년 2권의 학술지를 발행했다. 그 결과 2015년에는 등재후보 학술지가 됐고, 2017년 학술지 평가에서 드디어 등재학술지로 승격되는 성과를 이뤘다. 게재된 논문들의 주제들은 한국전쟁, 구술사의 학문적 자리매김, 구술사와 지역 연구, 몸과 구술, 재외한인의 구술사, 사회적 소수자와 구술사, 구술아카이브를 통한 역사쓰기, 구술아카이브 구축, 기억과 치유, 구술사와 민속, 엘리트 구술채록, 동아시아 구술사 등이다.
  이 논문들은 한국 구술사 연구의 특징을 보여주는 동시에 기존 역사학과 기록학에 대한 도전을 보여준다. 구술사 연구가 가장 많이 진행돼 온 한국전쟁에서부터 문헌기록에서 배제된 사회적 소수자와 기관 구술채록에서 엘리트 구술채록의 특징, 예술분야에서 구술사적 접근, 동아시아에서 구술사와 역사학과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구술사 연구의 주요한 쟁점들이 다뤄지고 있다. 이러한 주제들은 기존의 학문적 경계를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역사학의 경계를 확장시키는 것들이었다.
  한국에서 구술사가 시작된 이래로 구술사의 발전 과정은 경이적이라고 볼 수 있다. 1990년대에는 학문적 보수성으로 인해 구술사가 학문으로 인정받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후 2000년대에 들어서 ‘구술사의 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구술사가 폭발적으로 양적 성장을 이뤘다. 구술사는 국내에 학문적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지 20여 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제 하나의 연구방법이 아니라 학문분야로서 인정받게 됐다. 이제는 무엇보다도 구술 자료가 중요한 사료라는 것에 대해서 더 이상 물음표를 달 수 없게 됐다.
  이제 다양한 기관에서 구술채록과 더불어 구술 아카이브가 구축됨에 따라서 축적된 구술 자료는 앞으로 구술사 연구 발전의 든든한 토대가 될 것이다. 점점 한국근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의 목격자들이 사라지고 있지만, 현재 한국인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던 한국전쟁 이후의 사건과 변화들을 경험한 세대들이 서서히 구술자들이 되고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산업화 시기에 대한 기관 구술채록도 많이 이뤄지고 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한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다. 또한 1980년대의 주요한 사건들이 30년 이상 경과하면서 구술사 연구의 중요한 연구 주제가 되고 있다.
  한국구술사학회는 2016년부터 전국역사학대회에 참가해 주류 역사학에 도전하면서 동시에 역사학의 지평을 넓히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2016년에는 “구술사와 역사학과의 대화”를 주제로, 2017년에는 “기억과 역사-구술사의 위상과 방법론적 전유”라는 주제로 패널을 구성했다. 2018년에는 “말하기의 정치와 듣기의 윤리: 4.16구술 연구”라는 주제로 세월호 사건에 대한 구술을 구술사 연구에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한국구술사학이 나아갈 방향은

  2019년 올해 한국구술사학회는 10주년을 맞아 “‘구술사’를 넘어 다시 구술사로”라는 주제 하에 학술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세계적인 구술사가 알레산드로 포르텔리(A.Portelli)의 기조 강연을 비롯하여 구술의 기록, 구술과 기억, 이주, 트렌스내셔널 젠더, 도시의 구술사, 구술 자료 수집과 연구 현황, 구술 자료의 활용에 대한 9개의 세션이 진행될 예정이다.
  서양은 물론 아시아 내에서도 한국구술사학회의 성립은 매우 늦은 것이었다. 몇몇 동아시아 국가들에서는 구술사가 탈식민 시기 엘리트 중심의 민족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돼 왔다. 반면 한국의 구술사는 분단 상황에서 반공에 기반한 국가주의에 저항하는 다양한 집단들의 대항기억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발전됐다. 그러한 대항기억들이 공식적 역사에 편입되는데 구술사는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지난 10년 간 기관 구술채록의 증가는 엘리트 중심의 민족사를 회생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학회는 정당한 역사 연구로서 구술사를 자리매김하기 위해 애써왔다. 무엇보다도 역사학계 밖에서 하나의 운동으로 또는 사회과학자들의 연구로서 있었던 구술사는 역사학자들의 연구 성과로 인정받게 됐다. 양적인 성장을 이룬 구술 아카이브의 활용에 대한 고민도 구술사 연구자들이 본격적으로 논의하게 됐다. 이제 한국 구술사의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새로운 방향의 정립을 위해서도 국제적으로 한국의 구술사를 알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구술사가 학문으로 국내에 정착하고 한국구술사학회가 설립된 지 10년, 이제는 한국 구술사 연구가 내적인 성찰을 통해 거듭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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