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만 / 미술평론가

[예술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 - ① 회화: 군사정권과 신학철의 ‘모내기’]

어떤 예술작품은 사회적 맥락과 역사 속에서 바라봤을 때 무게를 다르게 지니는 경우가 있다. 역으로, 역사적 사건이 창작자에 의해 또 다른 매체로 다시 표현될 때 사람들은 사건을 감동적인 이야기로 내면화해 새롭게 기억하기도 한다. 굴곡 깊은 한국 근현대사를 작가의 시각으로 오롯이 담아낸 작품들에 대해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덧붙인 이야기를 집중 조명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회화: 군사정권과 신학철의 ‘모내기’ ② 영화: 제주4.3과 영화 ‘지슬’ ③ 문학: 5.18과 소설 ‘소년이 온다’ ④ 사진: 비틀어진 근현대사와 노순택의 ‘비상국가’


국가보안법 시대의 예술

최태만 / 미술평론가


  2018년 1월 29일 문화체육관광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지난 1월 26일 오전 10시 신학철 화백 <모내기> 작품을 서울지방검찰청으로부터 보관을 위탁받아 국립현대미술관에 보관했다’고 밝혔다. 붙임의 사진으로 작품이 상당히 훼손됐음을 알 수 있다. 검찰이 압수 후 작품을 서류봉투에 넣을 수 있는 크기로 접어 방치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난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의 한국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에서 신학철 작가와의 대담을 통해 <모내기>의 복원에 대한 생각을 들은 바 있다. 그의 입장은 명확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보수하지 말고 이 상태로 잘 보존만 하라고 말했어요. 훼손된 것도 역사의 증거물이니까.”

■ <모내기> 신학철作, 2018년 1월 29일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모내기> 신학철作, 2018년 1월 29일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모내기> 사건의 개요

  신학철은 1987년 8월 민족미술협의회 주최로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제1회 ‘민족미술 통일미술전’에 <모내기>를 출품했다. 88년 말경 민족미술협의회는 <모내기>를 수록한 89년도 달력을 제작, 배포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표면적으로는 이 작품이 이적(利敵)표현물로서 감시 대상이 아니었다. 인천의 한 노동운동단체가 <모내기>의 이미지를 사용해 부채를 제작, 배포하자 마침 이 단체를 수사하고 있던 공안당국이 탄압의 고삐를 죄어왔다. 89년 8월 17일 아침, 서울시경 대공과 소속 형사들이 신학철의 자택에 들이닥쳐 <모내기>를 비롯한 여러 자료를 압수하고 그를 연행했다. 검찰은 <모내기>가 북한을 이롭게 하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이적표현물이자 국가보안법 제7조의 찬양·고무죄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작가를 구속했다. 당시 검찰은 서울대공전술연구소의 ‘그림감정서’를 증거로 제출했는데 감정서의 주요 내용은 <모내기>를 “북한의 주장과 활동을 고무 찬양하고 그에 동조해 농민 등 일반대중을 자극, 각성시켜 반제·반미 투쟁과 반정부투쟁에 궐기시키려는 목적”의 선전·선동그림이라고 평가했다. 검찰은 공소장을 통해 ‘윗부분은 북한을 마치 낙원처럼 표현한 반면 아랫부분은 농부가 써레질을 하면서 소위 미·일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것과 군사 파쇼정권을 상징하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 … 삽으로 분단을 상징하는 38선의 철조망을 걷어내 버리는 형상’이 문제적이라고 강변했다.
  신학철은 구속 3개월 후 보석으로 석방됐고, 92년 11월 1심 재판에서 ‘북한의 활동을 동조할 목적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판단 아래 무죄를 선고받았다. 2심에서도 검찰의 항소가 기각됐지만 이후 98년 3월 대법원이 검찰의 상고이유를 받아들여 ‘모내기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99년 8월 13일 서울지법 결심공판은 신학철 작가에게 징역 10월, 선고유예를 선고했다. 작가는 상고했으나 대법원이 이를 기각함으로써 유죄가 확정되고 작품은 몰수됐다. 작가를 대리한 변호사가 유엔인권이사회에 “유죄판결이 유엔의 인권규약 제19조를 위반했다”는 개인통보를 함에 따라 유엔인권이사회는 한국정부에 “심리가 끝날 때까지 작품을 폐기하지 말 것”을 통보했다. 이어 2004년 4월 18일 “한국정부는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19조 표현의 자유 침해 사실을 인정하고 유죄판결에 대한 보상·유죄판결의 무효화·법정비용의 보상·그림의 원상복구 및 반환조치를 취하고 이를 90일 이내 인권위원회에 통보”하도록 권고했으나 법무부와 검찰은 작가의 작품 열람 신청조차 거부했다. 이렇듯 <모내기>는 검찰에 압수된 후 공판의 증거물로 제시될 때 외엔 접힌 상태로 어두운 창고에 방치된 채 빛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내기>는 과연 북한을 찬양한 이적표현물일까

  작품에 표현된 소재나 도상이 검찰의 주장처럼 북한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표현된 것인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먼저 천도복숭아로 둘러싸인 화면 속 공간이 한반도를 표상하는가. 모내기 중인 논의 윤곽이 마치 한반도의 지형을 연상시킨다 하더라도 윗부분을 북한으로, 아랫부분을 남한으로 확정할 근거는 없다. 모내기에서 추수에 이르는 농사 과정을 그렸을 뿐이며 등장하는 농민들을 남한과 북한 주민으로 특정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농민들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복사꽃 만발한 초가집과 연못의 풍경이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를 상징하는가. 또한 윗부분에 백두산을 그렸기 때문에 북한을 옹호한다고 볼 수 있는가. 화면 아래 철조망, 핵무기, 대중문화 등을 써레질하고 있는 모습을 북한의 연방제통일론이나 민중민주주의혁명론을 선동한다고 볼 수 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검찰의 답변은 ‘공안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자의적 해석으로 보인다.
  그러면 <모내기>는 왜 이적표현물이 됐을까. 이른바 ‘공안정국’이 농경사회의 이상향을 그려놓은 작품을 이적표현물로 만들었다. 89년 3월 25일 문익환 목사 일행의 방북을 계기로 노태우 정권은 경찰·검찰·안기부·보안사로 구성된 공안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재야·학계·문화예술계의 많은 인사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해 재판에 회부했다.
  모내기사건의 재판이 진행되던 90년 헌법재판소는 ‘국가보안법 제7조에 대한 위헌심판’에서 “법치주의와 죄형법주의에 위배되어 위헌의 소지가 있다”면서도 “국가의 존립·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줄 명백한 위험이 있을 경우에만 축소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헌법에 위반되지 아니한다”는 취지의 합헌결정을 했다. 모내기사건의 1심과 2심은 헌법에서 명시한 인권의 존중, 양심과 표현의 자유는 물론이거니와 90년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참고해 무죄를 선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대법원이 <모내기>가 이적표현물에 해당한다는 검찰의 상고를 받아들임으로써 헌재 결정 이전의 공안정국적 사고로 되돌아갔다. 국가보안법 제7조는 반공법으로부터 가져온 것으로 위헌적 요소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의적 해석에 따라 비판적인 표현의 단죄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여지가 많다. 국가존립을 위해할 의도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해할 위험이 명백히 없는 <모내기>에 대한 유죄판결이 이에 해당한다. 더 큰 문제는 이 조항이 존속하는 한 통제와 억압, 검열과 탄압을 통해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냉전적 사고’가 언제든지 되살아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검열의 내면화로 예술창작이 위축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냉전적 사고와 공안적 시각의 표적이 됐던 ‘모내기사건’은 위헌논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국가보안법에 대해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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