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원 / 문화연구학과 박사 수료

[속도를 사유하기 ① 속도의 철학자, 폴 비릴리오 ] 

현대인은 가속도의 시대를 살아간다. 기계 문명 속 인간의 삶은 편리하지만, 기계가 요구하는 속도를 따라잡긴 점점 버거워진다. 스마트폰, 스마트 워크, 성과로 이뤄지는 삶 속에서 하루를 사는 것이 아닌 소진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속도의 흐름을 멈추고 지금-여기 현대인의 삶을 ‘속도’의 관점에서 사유하려 한다. 사회면 첫 번째 기획에선 ‘속도’를 사유에 전면배치한 폴 비릴리오의 생각을 알아보고자 한다. - 문단 끝의 저서명은 문단에 인용된 폴 비릴리오의 키워드 개념과 연관돼 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속도의 철학자, 폴 비릴리오 ② 맑스주의와 속도 ③ 초연결사회와 속도 ④ 속도에 저항하기

 

“우리는 광속(光速) 숭배에 빠져 있다”
- 속도의 사고(Accident)를 경고한 폴 비릴리오 -

이재원 / 문화연구학과 박사 수료


  지난해 9월 10일, 폴 비릴리오(P.Virilio)가 심박정지로 생을 마감한 이후, 유럽 각국의 주요 언론들은 “우리 시대의 ‘속도의 사상가’가 영면에 들었다”며 앞다퉈 추모 기사를 내보냈다. 역사적으로 인류가 세계를 체험해 온 방식, 더 나아가 세계 자체와 관계 맺어온 방식에서 발생한 여러 변화를 ‘속도’라는 개념을 통해 일관되게 추적해오면서, 그 개념을 여러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키워드로 등록시킨 공로를 높이 산 것이었다.

  그런데 비릴리오에게는 또 다른 호칭이 있다. ‘예언자’라는 호칭이 그것이다. 미국의 어느 예술 평론가는, 선견지명 능력에 따라 이론가들의 등급을 매긴다면 비릴리오는 수위를 다툴 것이라는 추도문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비릴리오는 무엇을 예언 혹은 계시해왔는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가속화돼 온 속도가 인류에게 가져올 재앙, 비릴리오의 또 다른 키워드를 빌리면 ‘사고’이다.

 

 
 


속도의 네 가지 양태

  비릴리오에게 속도는 모든 동물의 생존, 그리고 종의 보존을 위한 경쟁에 필수적인 요소다. 포식동물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빨리 달려야 했던 태곳적부터, 적군의 동향을 앞서 포착해 기습할 수 있는 기동력을 갖춰야 했던 시기, 타인보다 더 많은 정보를 빨리 수집하고 활용해야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인류는 끊임없이 자신의 속도를 가속화해왔고 이로써 역사적으로 네 가지 양태의 속도가 등장한다.

  먼저 ‘생체(혹은 동물적) 속도’와 ‘기술적 속도’가 있다. 생체 속도는 인간의 생리적 특성(가령 근육의 단련, 반사 신경 정도)이나 심리적 특성(감정, 정서 등)에 의해 제한된다. 이런 한계를 인공적으로 보완하는 과정에서 인류가 획득한 것이 기술적 속도인데, 이 속도는 기계적 속도와 시청각 속도로 나뉜다. 전자를 가능케 한 것은 자동구동(동력) 장치의 발명이며, 후자를 가능케 한 것은 전자기파의 발견이다. 전자는 운송 혹은 이동 수단으로서의 인간이나 동물을 대체했으며(가장 상징적인 것으로는 자동차가 있다), 후자는 인간의 감각 기관을 대체했다. 가령 원격-청각으로서의 라디오와 원격-시각으로서의 텔레비전, 그리고 그 종합이자 결정체로서의 인터넷 혹은 가상 현실이 이에 해당한다.

  비릴리오는 속도의 역사에서 일어난 세 가지 혁명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 중 18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첫 번째 혁명인 ‘운송 혁명’(흔히 ‘산업 혁명’으로 알려진 그 혁명)을 통해 비로소 인류에게 기술적 속도의 신세계가 펼쳐진다. 그러나 한 번 가속화된 속도는 멈추기보다는 한층 더 가속화돼, 19세기 말부터는 두 번째 혁명인 ‘전송 혁명’이 일어나고,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세 번째 혁명인 ‘이식 혁명’이 본격화된다. 운송 혁명이 속도의 가속화의 본격적인 개시(기계적 속도의 획득)를 알렸다면, 전송 혁명은 이제 인류가 절대적 속도, 즉 빛의 속도에 근접하게 됐음(시청각 속도의 획득)을 보여준다(이론적으로, 진공 상태에서 전자기파의 속도와 빛의 속도는 동일하다).

  비릴리오가 말하길, 인간이 빛의 속도에 근접했다는 것은 신의 세 가지 속성인 편재성, 동시성, 즉각성을 획득했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인류는 신의 영역에 근접한 데 만족하지 않고 마지막 혁명인 이식 혁명을 통해 생체 속도와 기술적 속도를 융합하기 시작한다. 이로써 생체-기계적 속도와 생체-시청각 속도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 두 속도는 아예 빛의 속도를 인간에게 ‘이식’하는 것을 가능케 해줬다. 바야흐로 인류는 이 두 속도를 통해 신 자체가 되려고 하는 중이라는 것이다.


속도의 가속화와 사고

  그렇다면 이런 속도의 가속화는 구체적으로 어떤 사고를 일으켰을까. 먼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운송·전송 혁명은 인류 전체의 끊임없는 이동, 즉 ‘순환하는 거주’라는 사고를 일으켰다(《토착지: 다른 곳은 이곳에서 시작한다》, 2009). 비릴리오가 인용하는 보고서에 따르면, 2050년경까지 약 10억 명의 인구가 생태적(환경 파괴), 정치적(내전), 경제적(이주 노동) 이유 등으로 자신의 고향을 등질 것이 예상된다고 한다. 다른 한편, 자발적 이동도 빈번해진다. 2008년 약 3천7백만 명의 중국인들이 여행을 위해 집을 떠난 것이 그 사소한 예라면, 디지털 정보체계와 네트워크 덕분에 한 발자국조차 움직이지 않아도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는 가상 현전이 가능해지고, 초고속 열차나 제트기로 원하는 지역에 가서 모바일 폰이나 랩탑 컴퓨터로 얼마든지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예이다(《즉각성의 미래주의: 정지-배출》, 2009).‘정지-배출,’ 즉 “더 이상 멈춰 있지 말고 나가라”를 일종의 정언명령으로 만들어버린 이 사고는 일국적 차원에서 ‘패닉의 도시’를 탄생시키는 것으로 이어졌다(《패닉의 도시》, 2003).

  일찍이 게오르그 짐멜(G.Simmel)은 수많은 익명의 개인들이 군집해 살아감으로써 끊임없이 외부적·내부적 자극을 겪을 수밖에 없는 근대 도시인들은 일종의 방어기제로 신경과민, 둔감함, 반감이라는 심리를 계발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끊임없는 이동이 일상화된 탓에 기하급수적으로 일어나는 미지의 위협을 겪는 오늘날의 도시인들은 ‘공포’를 방어기제로 내면화한다. 특히 특정한 정서가 절대적 속도를 지닌 원격통신망을 통해 모든 곳에, 동시적이고도 즉각적으로 전염·전파되고 상호작용하는 일이 가능해진 오늘날 공포는 동기화(同期化)돼 전면화된다(《공포의 관리》, 2010).

  공포의 전면화와 일상화라는 이런 사고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인류는 ‘밀실도시’ 혹은 ‘초도시’를 발명해냈다. 밀실도시란 CCTV, 방벽, 사설 경호체계 등으로 요새화된 사적 공동체이며, 초도시란 절대적 속도로 가능해진 상호연결성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고 거주할 수 있는 가상 도시다. 외부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중으로만 출입하려고 약 2백50개의 헬기 착륙장을 건설한 상파울로의 부촌(富村)이나 두바이의 ‘초호화 굴락(Goulag)’이 전자의 예라면, 현실의 위협을 상상적으로 회피하도록 가상 현실에의 몰입을 제공해주는 아마존·페이스북·구글·이베이 혹은 그 복합체가 후자의 예다.


사고 박물관(Museum of Accident)과 재앙의 대학(University of Disaster)

  이런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그 어떤 위협도 거뜬히 견뎌낼 수 있는 초인이 되는 것이다. 즉, 테크놀로지를 통해 인간이라는 종의 인공적 진화를 이룩하는 것이다(《동력의 예술》, 1993). 그도 아니면 아예 새로운 세계, 아니 우주를 발견 혹은 창조하는 것이 그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우주 생성의 비밀을 밝혀낼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 ‘신의 입자’라고 불리는 ‘힉스 입자(Higgs boson)’의 존재를 발견하고 연구하고 있는 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의 시도가 그것이다(《거대 가속기》, 2010).

  이식 혁명으로 가능해진 전자의 시도는 ‘추적가능성’이라는 사고를 일으켰다. 가령 초도시에 진입하려고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순간부터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운동의 흐름)은 모두 추적되어 기록된다. 게다가 초인이 되기 위해 인공보철물(가령 생체 정보를 전달해주는 마이크로칩)을 육체에 이식하면 추적가능성은 더욱 정밀해진다. 그러나 후자의 시도와 관련해서는 아직 ‘원초적 사고,’ 그것으로부터 특정한 사고의 성격을 파악하고 추이를 쫓아갈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사고가 발견되지 않았다(《원초적 사고》, 2005). 비록 비릴리오는 거대강입자가속기가 블랙홀을 만들어낼 사상 초유의 위험을 언급하지만 말이다.

  감속(느림)이 속도의 가속화에 맞서는 방책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비릴리오는 늘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보다는 우선 속도가 무엇인지, 어떤 사고를 일으키는지, 기술적 진보는 어떤 형태의 위험을 수반할지에 대해 더 면밀히 사유해야 한다고, 또 이에 대한 집단적 사유를 뒷받침해줄 ‘사고 박물관’과 ‘재앙의 대학’을 건립해야 한다고 말이다(《재앙의 대학》, 2007). 물론 비릴리오는 이 두 기관이 물리적 실체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광속에 대한 숭배에서 한걸음 벗어나 속도 자체를 더욱 더 정치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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